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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Jun 13. 2020

샤먼, 최고급 호텔방에서의 허망한 밤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5편 중국 여타 도시-03)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중국 여타 도시 



3. 샤먼, 최고급 호텔방에서의 허망한


2005~6년 광저법인에 근무하던 시절 법인의 거래선 중 하나로부터 인근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에 출장을 갈 일이 있으니 그곳에서 업무협의자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거래선은 중국 전역에 유통망을 갖고 있었던 중국 최대 소매 유통업체였고, 그런 만큼 우리가 판매 물량도 매우 많았다. 하지만 제품을 판매하고도 장기간 못 받은 대금이 여러 건 있는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던 우리는 기꺼이 그 제안을 수용하고 업무협의 겸 저녁식사를 샤먼에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실 말이 업무협의 겸 저녁 식사지, 그러한 만남은 실제로는 당시 중국 비즈니스의 관행이었던 술접대를 하는 그런 자리였다. 거래선의 얘기는 풀어서 다시 말하면 샤먼 출장 가는데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곳에 가는 너희도 한번 와서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한잔 거하게 하자는 그런 얘기였던 셈이다. 물론 비용은 당연히 우리가 부담해야 했었다.


어쨌든 그 거래선의 그러한 요구 덕분에 나 역시도 광둥성 광저우에 근무하던 기간 인근 푸젠성의 아름다운 샤먼이란 도시도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샤먼은 인구 약 400만 명의 중급 도시로, 대만섬 바로 에 위치한 중국 남부의 항구 도시다. 청(淸) 나라에 대항하여 명(明) 나라 부흥운동을 던 정성공(鄭成功)과 수십만에 달하는 그의 군대가 대만으로 밀려나기 직전에 바로 이곳에 주둔했던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다.


또 샤먼은 전 세계로 흩어진 많은 화교를 배출한 도시로도 유명하다. 동남아, 유럽, 북미 등 전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화교들이 과거에는 중국 표준어가 아닌 푸젠 지역의 언어인 민난어(閩南語)를 주로 사용했던 이유 역시 그들이 바로  샤먼이라는 항구 도시를 통해서 중국을 빠져나간 푸젠 지역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민난는 영어로는 'Hokkien(호끼엔)'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곳 지명 푸젠(福建)이 표준어로는 'Fujian(푸젠)'으로 발음되지만, 푸젠의 언어인 민난어로는 'Hokkien'이라고 발음되기 때문이다.




샤먼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고, 거래선과 식사하러 가기 전 시간 여유가 좀 있어서 바닷가 근처의 호텔 주변 거리를 홀로 거닐며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경치가 너무 좋았고 인적이 적은 조용한 거리도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걷다 보니 샤먼의 그 거리에성인용품을 판매한다는 간판이 붙어있는 상점이 유독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베이징에서도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상점은 한국에서 보다 훨씬 자주 볼 수 있어 의외였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성인용품 상점이 좀 으슥한 골목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 중국에서는 대로변에 당당하게 들어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과 왜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산체제하의 사회라서 좀 더 폐쇄적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선입견과는  다른 현상이었다.


한편 거리를 계속 걷다 보니, 거리의 느낌이나 건 다른 중국 도시와는 꽤 다르고, 오히려 유럽의 거리나 건물처럼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역시 좀 의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샤먼에는 이미 1852년부터 영국 조계(租界)가 설치되어 운영되기 시작했고, 1902년부터는 유럽 8개국과 일본이 공동 관리하는 공동 조계 또한 추가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런 샤먼의 조계가 완전히 폐쇄된 것이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이라 하니 샤먼에는 근 100년 가까이 유럽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존재했었던 셈이다. 결코 짧지 않은 그 기간 다양한 국적을 가진 유럽인들의 삶의 방식과 문화가 그들이 거주하던 조계와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전파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그렇게 이국적 느낌이 물씬 와닿는 건물과 거리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샤먼 조계가 들어서게 된 계기는 중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홍콩의 영구 할양을 요구할 때 역시 광저우, 푸저우,  상하이, 닝보, 샤먼 등 중국의 해안가에 있는 5개 도시 개항도 동시에 강요했었고, 중국이 어쩔 수 없이 이를 수용하면서 샤먼에 영국 조계를 허용한 것이 그 시작이었


 이후 미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심지어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그리고 일본도 청나라를 협박하여 영국과 비슷한 특혜를 받아냈고, 결국 '구량위(鼓浪嶼)'라는 샤먼의 섬에 이 국가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조계가 추가로 설립되게 된 것이다.


량위 공동 조계는 상해 공동 조계와 함께 당시 중국  운영되던 두 개의 공동 조계 중 하나였는데, 2017년 7월 그 지역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중국의 52번째 세계 문화유산이 되기도 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멋을 가진 랑위의 건축물과 거리 이면에는 알고 보면 이처럼 서구 열강에 유린당해 자신의 영토 안에 치외법권적 권리가 인정되는 수많은 조계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 중국의 아프고도 치욕스러운 역사도 함께 새겨져 있는 셈이다.


(구량위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shinwoocnt/221782683035


(량위의 유럽풍 건물, 거리 모습)

https://zhuanlan.zhihu.com/p/62119667




당시 샤먼에는 광저우 법인의 '연락사무소'도 있었는데, 이번 샤먼 출장 기회에 그곳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법인 바로 아래 단계의 지역조직인 직원 40~50명 규모의 판사처는 중국 이곳저곳에서 이미  차례 방문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판사처의 산하에 있는 일선 지역조직인 연락사무소는 이번 샤먼 사무소 방문이 처음이었다. 따라서 처음으로 가보는 연락사무소라는 곳의 현장 모습나름 꽤 궁금했는데, 샤먼 연락사무소에 가보니 4명 정도의 소수 인력이 일종의 오피스텔 같은 곳을 사무실로 삼아 근무하고 있었다.


너무도 작고 아담한 사무실도 인상적이었지만 꽤 특이했던 점은 현대식 건물이었음에도, 오피스텔 안에 있는 화장실의 변기는 좌변기가 아니라 쪼그려 앉아야만 하는 변기였다는 것이었다. 현대식 오피스텔 건물에 그러한 변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의외였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타인이 사용하던 좌변기에 내 엉덩이 살이 닿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그러한 구식 변기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해석도 있었다.




거래선과의 식사에는 우리 측에서는 광저우 법인 법인장과 주재원 4명, 현지인 간부 5~6명 등 총 10여 명이 참석했고 거래선 측에서도 역시 대표를 포함하여 비슷한 수의 간부가 참석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알고 보니 거래선 측 인력은 우리가 있던 방으로 들어온 그 10여 명이 전부가 아니라, 다른 방에 그 수의 3~4배가 되는 인원들이 더 있었던 것이었다. 화장실 가기 위해 방 밖으로 나와보니, 샤먼 연락사무소 직원들이 다른 방으로 부지런히 들락날락하고 있길래 다른 방에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거래선이 있는 방에 신경을 쓰라고 했더니 다른 방에 있는 수십 명의 손님들 또한 모두 거래선 대표가 함께 데려온 일행이라는 것이었다.


즉, 우리와 식사할 때 식사값 및 술값은 어차피 모두 우리가 지불하니, 이 기회에 샤먼 및 인근의 거래선 회사 직원 모두 불러서 맘껏 먹고 마시게 하고, 그 회식비를 모두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그런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 근무 경험이 오래되지 않았던 나는 그런 상황이 꽤 황당하게 받아들여졌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근무해왔던 동료 주재원들은 그런 방식의 저녁 식사 접대가 이미 비일비재했다는 듯 당연시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그 식당의 수많은 방 여기저기서 식사와  마시기가 시작되었고, 거래선의 대표와 같이 있던 방에서도 본격적으로 술 마시기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중국의 술자리 불문율대로 절대 권하는 술 사양하면 안 되고, 한쪽이 술에 취해 먼저 실신할 지경이 될 때까지 술은 계속 마셔야 다.


전쟁이라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겠지만, 실제로 술을 무기로 하는 전쟁과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었는그 술 '전쟁'에서 이기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밀린 대금도 받고 또 기타 여러 가지 문제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우리는 나름 미리 치밀한 각본을 준비해서 갔다. 그 각본에 의하면 우선 폭탄주를 마시도록 유도하는 것이었고, 그다음으로는 우리 쪽 인원들이 순서를 정해 거래선 대표 1명 집중 공략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즐겨 마시는 백주는 한국 소주보다 훨씬 독하다. 따라서 그러한 백주에 익숙해진 중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는 한국인들이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중국인들은 술을 섞어서 마시던 문화가 없어서 폭탄주에는 다행히 약했는데, 그런 점에 착안해 폭탄주를 만들어 같이 마시면 한국인들이 이길 확률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중국어로는 폭탄주를 '짜단지우(炸弹酒)'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폭탄주'를 그대로 번역한 중국어로서, 중국의 최대 포털 사이트 Baidu에도 이 단어에 대한 설명이 등재될 만큼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단어였다. 그런데 Baidu에서도 중국의 '짜단지우'한국'폭탄주'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자랑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폭탄주라는 음주 문화도 이미 오래전부터 음주 분야에서는 중국 내의 대표적인 '한류(韓流)'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계획대로 폭탄주를 만들어 사전에 짜 놓은 순번대로 번갈아 돌아가며, 거래선 대표를 집중 공략했다. 한편 나는 초반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술을 잘 마시지만, 일정한 양이 들어가면 결코 더 이상 마시지 못한다. 만일 그 상태에서도 더 마셔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마시다 그대로 잠에 빠지는 장점 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내가 제일 먼저 폭탄주를 주고받는 역할을 맡았다.


 잔에 그들이 가득 따라주는 술을 비우고, 바로 또다시 권하는 행동을 내가 연속해서 보여주니 그들은 예상대로 꽤 놀라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빠르게 술 마시는 한국 사람을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 같고, 마치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술 상무(常務)'어디에선가 초빙해온 것 아닌가 하는 것 같은 눈치로 우리를 바라볼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 나는 일정량 이상은 결코 마시지 못했고 이제 한계가 오자 그 자리에서 조용히 뻗어서 꿈나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억이 거의 없는,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초반에 워낙 빠른 속도로  대표를 집중 공략한 덕에 내가 실신하다시피 해서 떠날  거래선 대표도 이미  취해 있었고, 이후 정해진 순번대로 연이어 우리 측 인력들이 그를 집중해서 공략하자 나중에는 인사불성이 되어 제 발로 걸어 나가지도 못해서 직원들이 업고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 술 전쟁 다음날 그간 그 거래선으로부터 못 받았던 밀린 납품 대금 모두를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가 술값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희생해가며 그렇게 열심히 술 접대한 것에 대해 그 거래선 측에서도 나름 성의 표시는 한 셈이었다.


다음날 광저우로 돌아가는 항공기를 타기 위해 샤먼 공항에 갔을 때, 역시 자신의 근무지로 돌아가려는 거래선 대표를 공항에서 다시 마주쳤는데,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보고는, 어제저녁 일이 겸연쩍었는지 모르는 척하고 방향을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술 전쟁은 그렇게 우리 측의 압도적인 승리끝을 맺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날 그 술자리를 떠난 이후에 또 다른 해프닝이 있었다. 너무 많은 술을 마셔 기억도 희미한 상황에서, 나는 샤먼 연락사무소 직원들에 의해 식당 근처 호텔로 옮겨져 실신상태 그대로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다.


어떻게 Check-In 했는지도 기억이 없는데, 술이 아직도 완전히 깨지 않은 몽롱한 상태로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웬 모르는 어느 호텔 방에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누워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날이 광저우로 돌아가는 날이라, 서둘러 계산을 하고는 호텔을 나와서 호텔 앞에서 기다리던 연락 사무소 직원들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급하게 계산한 호텔 방값 영수증을 차 안에서 다시 보니, 보통 호텔 값의 4~5배 정도나 되는 엄청나게 비싼 금액이 적혀 있었다. 급히 차를 돌려서 호텔로 다시 가서  값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항의했더니, 그 호텔 방 중에 가장 비싸고, 가장 넓으며 또 가장 높은 에 있는 Presidential Suite Room에서 어제 내가 잤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아침에 호텔방을 나올 때 방이 이상하게 꽤 컸고 방도 하나가 아니라 거실에 2~3개의 방이 딸린 그런 방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던 기억이 났다. 내가 왜 거기서 잤냐고 물으니, 당신들이 제일 좋은 방을 달라고 해서 그 방을 제안했었을 뿐이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기억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직원들에 의해 호텔 방 안으로 실려 들어왔고, 또 술도 아직 깨지 않은 상황에서 경황없이 계산하고 Check-Out 했으니, 나는 내가 실제 어떤 방에서 잤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지만, 실제 내가 그 방에서 숙박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내가 숙박했던 그 방의 방 값을 청구했다는데 더 이상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샤먼 사무소 직원들과 함께 조용히 호텔을 나와서 다시 공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 숙박비는 당시 내 직급의 주재원이 숙박할 수 있는 방 값의 한도를 한참 초과하는 수준이라서 회사에 출장비로 청구할 생각은 감히 엄두도 못 냈고, 고스란히 내 비용으로 처리해야 했었다.


나를 그 호텔로 데려간 샤먼 직원들은 제대로 된 방을 잡아 주지 못한 것에 대해 내게 매우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는데, 아마도 외국인으로 주재원인 나의 숙박비 한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오해했던 것 같고, 또 당시 거래선과 아직 술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던 상황이라 다시 식당으로 급하게 돌아가야 해서 제대로 나를 챙기기도 어려웠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해안가의 도시 샤먼, 그것도 바다가 보이는 멋진 호텔의 가장 높은 층에서 평생에 처음으로 Presidential Suite Room에 들어가서 1박을  셈인데 실신한 상태로 들어가 아무 기억도 없이 눈 뜨자마자 바로 나왔으니 결국 그냥 허름한 여관방에서 잔 것과 결과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그 엄청난 방값을, 그것도 모두 자비로 지불해야 했으니, 그날의 기억은 참으로 속 쓰린 기억이었고 참으로 허망하고 원망스러운 하룻밤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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