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LT Jul 31. 2020

중국 대륙을 떠나며....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5편 중국 여타 도시-19)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중국 여타 도시



19. 중국 대륙을 떠나며....


90년대 초반 신입사원 시절에 중국 OEM 제품 Sourcing 업무를 잠시 담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OEM 제품은 중국의 후이저우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됐지만, 거래선의 사무소는 홍콩에 있어서 홍콩인 직원을 Counter Partner로 업무를 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직원으로부터 " 군인이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라는 얼토당토않은 메시지를 받았다.


당시 그 공장에서의 업무상 실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예를 들어서 미국에 있는 거래선이 110V 전원에 하얀색 샘플을 보내달라고 하면 엉뚱하게도 220V 전원에 검은색 샘플을 보내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미국은 110V 사용 지역이라서 220V용 제품은 별도 장비가 없는 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실수가 너무도 빈발해서 전 세계 거래선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오는 실정이라서 여러 차례 재발 방지를 부탁했는데 그럼에도 그 공장에서의 실수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앞으로는 그런 실수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 손실 비용을 그 공장에 지급해야 할 대금에서 바로 차감하겠다고 했더니 그런 답을 보내온 것이었다.


실수와 문제가 반복돼도 개선 대책들통보해 주기보다는 변함없이 대충 넘어가자는 그런 의미의 메시지였던 셈이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의 그런 업무 태도 때문에 당시 OEM Sourcing 업무를 하면서 속을 꽤나 끓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을 하게 되면서 중국에 대한 인상도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갔던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OEM Sourcing 업무는 약 1년 정도만 잠시 담당했었고, 또 당시에는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못했고 미래에도 배울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 그런 지역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 전공이 어학이라 그런지 나는 회사에 입사한 이후에는 줄곧 수출부서 또는 해외법인에서 근무했다. 처음 담당했던 업무는 중남미 지역 수출 업무였다. 이후에는 회사에서 보내주는 1년짜리 어학연수로 프랑스 파리에 가게 되었고, 돌아와서 첫 번째 주재 근무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캐나다에서 귀국할 즈음에는 물론 저가 제품에만 국한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과거에는 전 세계 시장에서 전혀 그 존재를 찾을 수가 없었던 다양한 중국산 제품들이 서서히 여기저기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던 것으로, Walmart 등 북미 대형 매장의 저가 제품은 이미 거의 대부분 'Made in China'였고 중국산 제품들이 없다면 Walmart는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 새로운 현상을 보면서 향후 인구 13억의 중국 시장이 매우 큰 시장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처럼 잠재성이 높은 중국 시장에서 근무해 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들었다. 그래서 중국에 주재 근무할 기회를 계속해서 고 있었지만 중국어가 전혀 안되던 시절이니 내게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당시 내가 근무를 던 부서 업무와 연관되는 부서가 중국 베이징에 신설되면서 운 좋게 그 신설 부서로 발령받을 기회가 생겼고 중국어 자격 취득을 전제로 베이징 발령 대상자가 되었다. 이후 어학 자격 취득을 위해 경기도 용인 산속에 있는 회사의 연수원에서 3개월간 중국어 합숙 교육을 받고 간신히 턱걸이로 시험에 통과해 마침내 중국의 베이징에 부임할 수 있었다.


주재 나간다고 근무도 안 하고 연수원에 입소해 3개월이나 합숙하면서 어학 교육까지 받고도 시험에 떨어져 다시 원래 근무하던 부서로 되돌아가는 것은 정말 너무도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모두가 절박한 심정으로 열심히 중국어를 배워서 그런지 그때 같이 합숙하며 중국어를 배우던 동료들 중에는 그 누구도 시험에 탈락한 사람이 없었다. 내 나이도 당시 이미 40을 넘겨서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늦은 나이였으나 나 역시 절박한 심정으로 꽤 열심히 중국어를 배웠다.


그때 중국어 배운다고 산속에서 틈만 나면 지겹도록 들었 중국어 노래들이 다. 바로 라오슈아이따미(老鼠愛大米),

티엔미미(甛蜜蜜), 위에량따비아오워더신(月亮代表我的心), 펑요우(朋友) 같은 노래들이었다. 중국과는 전혀 관련 없었던 내가 처음으로 들었던 중국 노래들이었는데, 외로 노래가 꽤나 감미로워 중국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노래들이었다.


(라오슈아이따미, 04:43)

https://www.youtube.com/watch?v=19yjk5xVDC4

(펑요우, 04:38)

https://www.youtube.com/watch?v=6lbPgfKK7m4


연수원에 갇혀 살면서 재미있는 시도를 했던 기억도 있다. 어차피 산속에만 있으니 누구 만날 사람도 없고 이 기회에 수염을 한번 길러보면 어떨지 시도해 던 것이다. 그래서 며칠 면도를 안 했더니 콧수염이 자라기는 했는콧수염이 자라난 모습을 보니 만화에 등장하는 간신들의 수염처럼 가운데는 수염이 별로 없고 끝부분에만 집중적으로 자라는 모습이었다. 내게콧수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깨우쳤고 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 인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같았던 중국과는 결국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후 홍콩과 대만 포함해 중화권에서 무려 9년 넘게 근무하다 귀국했다. 불어 전공한 내가 어쩌다 중국 주재 나가서 10년 가까이 중화권 지역을 돌아가며 인생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그만큼 잘 알지 못하고 게다가 편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 부임을 해서 그곳에서 살아보니 중국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정말 그러한 표현이 어울리는 나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중국에 살아본 한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중국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겠지만, 그만큼 한국인에게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가 중국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역사적으로 그렇게 빈번히 접촉해 왔었음에도, 중국과 한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중국에 거주하면서 때로는 그전에 거주했던 지구 반대편 유럽의 프랑스나 북미의 캐나다가 오히려 훨씬 이해하기 쉽고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우리와 더 비슷했다는 그런 느낌까지도 들었을 정도였다.


언어에서도 중국어와 한국어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중국어를 배운 사람느끼겠지만 문법으로 보면 중국어는 오히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영국이나 미국의 언어에 가깝게 느껴진다. 영어의 "I + like + it"과 중국어에서의  "我(I) + 喜欢(like) + 它(it)"는 글자만 다르지 주어+동사+목적어 순서가 정확히 일치하고 단어 사이에 어떠한 조사도 필요가 없다. 문법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로 말해야 하니 우선 동사와 목적어 순서가 다르고 또 중간중간에 조사도 필요하다.


존칭어에 대해서도 양국은 크게 다르다. 한국어는 존칭어가 매우 발달되어 있는 반면에, 중국어에는 존칭어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 '당신(您,닌)'이라는 존칭어가 있지만 실제 거의 사용되지가 않고 영어의 'You'처럼 단순히 '너(你,니)'라고 나이 및 친밀도에 관계없이 쉽게 표현한다. 중국 공무원도 처음 보는 나 같은 외국인에게 바로 '너(你)'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도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차라리 영어에 가까운 관습인 같았다.


문화적으로도 차이가 많은데 중국은 젊은 남녀 간의 동거가 꽤 흔하고 공개적이다. 베이징 사무실에 있던 미혼의 우리 부서 여직원이 동거하는 자신의 남자 친구를 부서의 회식에 데리고 나올 정도였다. 결혼했냐고 물어보그것은 아니고 아직은 동거 상태라고 떳떳이 이야기한다. 이러한 면에서도 미국이나 유럽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 남녀 간에 결혼 전 동거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고 더군다나 부서 회식에 동거인을 동반해서 데리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해외 영업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한국인이 일본인을 상대로 거래해서 돈 버는 경우는 있어도, 중국인 상대로 좀처럼 돈을 벌기가 어렵다는 말도 자주 회자되곤 했었다. 그만큼 중국인을 상대하기가 한국인에게는 쉽지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중국 시장이 회사 미래를 좌우할 것처럼 중국에 진출하는 것에 사운을 걸었던 수많은 한국의 기업체 중 너무도 많은 기업들이 이미 중국에서 철수했거나 혹 여전히 남아 있어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 철수하는 기업들)

https://www.yna.co.kr/view/AKR20141115046400003?input=1195m


정치적으로도 그렇다. 한국이 중국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중국의 위압과 술책에 항상 끌려 다니고 놀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아마 나 혼자만 아닐 것이다. 결국 그만큼 중국과 중국인은 우리가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는 이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내가 중국에서 근무를 했던 2000년대 중후반에는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돈 많은 선진국의 국민으로 대접받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중국 대도시의 물가도 한국보다 크게 낮아서, 식당, 술집, 안마소 등 온갖 유흥시설의 가격은 한국에서의 가격 반도 안되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외국인으로서는 참 풍족한 생활을  수 있었던 그런 장밋빛 같은 시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물가도 역시 급격히 상승했고 아울러 군사력도 동반 상승해, 경제규모나 군사력 면에서 중국이 미국에 이어서 2번째라는 G2로까지 부상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대접받으며 저가에 중국의 많은 것들을 향유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은 이제는 희미한 과거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오히려 최근에 중국의 돈 많은 관광객들이 한국에 놀러 와서 한국 유흥시설을 즐기고 가는 실정이라 한다.     


사실 중국의 그러한 변화, 즉 경제가 성장해서 부자 나라가 되고 강국이 되는 것을 이웃나라로서 축하하고 기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중국이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어차피 민족과 역사가 다르니 있을 수 있는 현상이고 이와 같이 다르다는 이 부정적 의미가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성장해서 강국이 되어 갈수록 주변국을 더욱 겁박하고 위협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이 강할 때는 항상 주변국을 침략하고 위협해왔던 동일한 역사가 어김없이 또다시 재현되고 있는 이다.


최근 한국이나 베트남, 필리핀 등 다수의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의 노골적인 압박과 위력 행사에 고스란히 노출이 되어 있다. 사드(THAAD)라는 이슈를 빌미로서 한국은 중국에 전방위적으로 당하기도 했다. 중국의 일개 공무원이 한국에 와서 기업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국이 대국에 대항을 하면 되겠느냐고 훈계까지 할 정도로 안하무인인 경우도 있었다. 중국은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동남아의 국가들에 대해서도 같은 발언을 했다. 중국의 눈에는 주변국은  소국으로만 보인다는 얘기다.


(중국 외교부 공무원 한국에 대한 발언)

https://www.huffingtonpost.kr/2017/01/05/story_n_13989238.html

(중국 외교부 부장의 동남아 국가에 대한 발언)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636005


한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에 의한 고조선 및 고구려의 멸망, 공물과 함께 여자까지 바쳐야 했던 공녀 제도, 홍건적 침입,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중국에 끌려갔다가 정조를 잃고 돌아오는 환향녀, 6.25 전쟁 개입 등 우리가 중국에 당했던 치욕의 역사는 이미 너무도 많다. 런데 현재도 또 당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되어 각 민족별로 별개의 국가로 공중분해될 때, 언젠가 중국도 그렇게 민족별로 분해가 될 것이라는 예측들분분했었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다민족 국가인 소련의 민족별 해체 과정을 목격 있었던 것이 중국에게는 그러한 사태에도 대응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과 계기를 제공한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소수민족 지역으로의 꾸준한 한족 인구 이동도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최근 수십 년간 만주, 내몽고, 티베트, 신강 등 중국 내 소수민족 지역으로의 한족의 이주는 지속 늘어 이제 만주, 내몽고 같은 지역에서는 한족 인구가 이미 각각 90%, 80% 넘는다고 한다. 한족 인구가 압도적인 다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소수민족 땅에서도 한족이 절대적인 다수가 되어 버리면 결국 그 땅은 쉽게 중국에서 분리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러시아인이 다수인 크림반도가 러시아에서 분리됐다 결국 2014년 다시 러시아로 흡수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크림반도 내 러시아계 인구 비중 65% 이상)

https://pgr21.com/freedom/85579


이제 한족들의 대대적인 이주로 소련이 해체될 때 민족별로 영토가 분할된 것과 같은 현상이 중국에서도 다시 재현되것은 기대하기 더 어렵게 된 셈이고, 중국은 영토 손실이나 분할 없이 거대한 국토를 가진 강국으로 미래에도 남아있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그리고 그런 강국으로서의 중국의 고압적 자세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 주변국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와 개인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에 거주하는 기간 만난 많은 중국인 중에는 다른 여느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악한 사람도 있었지만, 너무도 선하고 좋은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여러 편에 걸쳐 나누어서 쓴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중국에 거주하던 기간에 경험했던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들도 역시 많았다.


이렇게 좋은 추억들 경험으로 중국을 기억하고 있는 나와 같은 한국인에게 중국의 성장이 이웃들에 대한 막무가내식 압박과 위협의 증가로 인식되 없이,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국가의 외국인이 중국의 발전과 성장을 기쁜 마음으로 손뼉 치며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중국은 소국(小國), 대국(大國)이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구사하며 주변국을 소국으로 인식하고, 자신이 강해질수록  겁박하고 있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니 과연 이러한 나의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없다.


그런 걱정과 아쉬움을 갖고 그리움, 미련, 향수가 가득했던 중국 대륙에서의 생활은 이 글을 마지막으로 접는다.  


사진) 중국을 떠나기 전 베이징에서의 마지막 밤 이삿짐을 싸서 현관에 놓고 찍은 사진. 이삿짐은 사진 속 가방 3개가 전부였다. 중국 여기저기 그렇게도 돌아다녔지만 결국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 제외하면 들고 갈 것저것밖에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