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야사(野史) (2-1)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7편 HK, Macau-04)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Hong Kong, Macau



4. 홍콩 야사(野史) (2-1)



■ 영국의 치욕이 각인된 Peninsula 호텔


"해가 지지 않는 국가"라고 할 만큼 전 세계 수많은 지역을 점령해 식민 지배해 왔고 또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중국인 등 백인이 아닌 피지배 이민족들을 지속적으로 경멸해 왔던 영국이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동양인에게 국가 간 정규 전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하는 전투가 있었다. 바로 1941년 12월 8일부터 25일까지 전개된 일본과의 홍콩 전투였다.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후 몇 시간도 안돼 당시 영국령이었던 홍콩도 공습하기 시작했다. 홍콩 경우도 진주만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선전포고는 없었다.


그런데 전투가 발발한 지 채 며칠 되지도 않아 영국은 신계, 구룡, 홍콩섬 등 홍콩 전 지역을 삽시간에 일본에 빼앗기고 결국 전쟁 발발 단 17일 만에 일본에 항복하고 싱가포르로 후퇴했다.


중국에 노골적으로 마약을 팔만큼 막무가내였고, 무력으로 위협해 홍콩 등 중국 각 지역을 강제로 할양해 가거나 또는 중국 대도시 여기저기에 자신들의 특권이 보장되는 조계를 설치해 치외법권적 지위를 맘껏 향유해왔던 영국으로서는 홍콩에서의 이 패전이 동양인으로서 편성된 군대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패전이었고 또 영국이 직접 통치를 했던 해외 식민지에서 영국군이 외국 군대에게 항복한 최초 사례였다 한다.


홍콩 전투에서 일본군은 불과 600여 명만 전사했던 것과는 달리, 영국군은 2000여 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으며 포로로 잡힌 영국군은 무려 1만 명이나 됐다. 게다가 불과 한 달도 안돼 체결된 항복 조인식도 하필이면 영국인에게는 일 년 중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라는 크리스마스에 진행되어 패전과 항복의 충격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이 패전은 영국에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처음으로 겪었던 매우 치욕적인 패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치욕적인 항복 조인식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그 당시 홍콩 침공 일본군 사령부로 사용되었던 침사추이의 Peninsula Hotel이었다. 이 호텔은 동양 내 최고를 목표로 영국인이 1928년 완공시킨 호텔인데 바로 이 화려한 호텔 3층에서 항복 조인식이 이루어졌고 또 이후에는 이 호텔이 일본군 장교 숙소로 장기간 사용되기도 했다 한다. 영국이 공을 들여 건축한 최고급 호텔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최초로 항복을 서명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고 또 적군 장교 숙소로까지 사용되었던 셈이다.


(Peninsula 호텔)

https://m.blog.naver.com/evasionkorea/220076299642

(항복 조인식 장면)

https://www.enemyinmirror.com/hong-kong-falls-dec-25-1941/

(일본군의 홍콩 거리 시가행진)

https://www.thoughtco.com/battle-of-hong-kong-2361469


한편 홍콩을 점령한 일본의 야만적 행동은 그 이전 홍콩을 지배했던 영국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일본이 홍콩을 지배했던 3년 8개월간 일본군의 홍콩 여성 강간은 항상 묵인되는 상황이 지속되었고 또 약 1만여 명에 달하는 홍콩 주민들이 그 기간 고문과 처형에 목숨을 잃었다 한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은 중국의 도시를 함락시킬 때마다 상상하기 어려운 잔인한 행태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왔는데 홍콩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었다.


일본의 이러한 잔인한 통치 그리고 이어지는 실업자의 강제 출국 조치 등으로 홍콩의 인구는 급감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일본이 홍콩을 점령한 1941년에는 160만이던 홍콩 인구는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에는 불과 60만으로까지 감소되기도 했다. 일본 통치 3년 8개월 사이에 100만 명의 홍콩인이 죽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시아의 또 다른 영국군 기지인 싱가포르로 철수한 영국은 그곳에서 약 2개월 뒤 다시 일본의 공격을 받았는데 영국의 수상 처칠도 '영국군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라고 표현했었을 정도로 이 전투에서마저 영국은 또다시 처참하게 일본에 대패했다.


1942년 2월 8일부터 시작됐던 싱가포르 전투는 홍콩에서 보다 훨씬 더 짧은 기간인 불과 8일 만에 영국군의 항복으로 끝났는데, 과거 홍콩에서의 전투는 병력에서 일본군이 다소 우세했던 반면 이 싱가포르 전투에서는 영국군 병력이 8만 5천 명으로, 3만 6천 명 수준이었던 일본군의 2배가 넘는 규모였음에도 일본에 대패했다. 당시 영국군 전사자가 5천 여명 규모였고 포로로 잡힌 영국군만 8만여 명이었다 하니 총 병력 8만 5천 명중, 5천 명은 전사하고 나머지는 전원이 항복했던 셈이다. '영국 역사 최악의 재앙'이라고 불릴만한 이유가 충분했던 패전이었던 셈이다.



■ 해적들의 근거지

홍콩은 구룡(九龍)과 신계(新界) 등 대륙에 붙어있는 영토 외에도 홍콩섬 등 모두 235개나 된다는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그런데 이 235개의 섬 중에서 홍콩섬 면적이 가장 넓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가장 넓은 섬은 란타우(大嶼山)라는 섬으로 그 면적이 147 ㎢ 홍콩섬의 약 2배에 달한다.


이 섬에는 현재 홍콩 쳅락콕 국제공항이 들어서 있으며, 섬 중앙에 있는 산에는 매우 잘 짜인 등산로가 있고 또 주변의 해안가에는 바다가 보이는 분위기 좋은 서구풍의 맛집들이 여러 채 들어서 있다. 그런데 마침 이 란타우섬의 공항 인근 Tung Chung 아파트 단지에 공군 학사장교 동기 한 명이 거주하고 있어 주말에는 종종 그 친구와 함께 란타우 산의 트랙킹 코스를 돈 이후 해질녘에는 내려와서 바닷가 인근의 식당에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곤 했었다.


사진) 란타우 산 트랙킹 코스를 돌고 동기와 함께 내려와서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던 시절 모습 (2013. 11월)


란타우섬뿐 아니다. 주윤발이 태어난 '람마(南丫)'섬이나, 빵 축제로 유명한 '청차우(長洲)'섬 등 홍콩섬 주변의 여러 작은 섬들도 주말에 방문해 보면 남국적인 정취와 낭만들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섬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작은 섬들의 해안가에는 란타우의 서구식 분위기의 식당들과는 다르게 전형적인 홍콩 스타일의 식당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식당에서는 조개, 게 등 인근 바다에서 잡을 수 있는 다양한 해산물들로 만든 맛깔스러운 음식들을 팔고 있었는데, 솔직히 위생상태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식당에서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와인 한잔과 함께 해산물을 먹던 낭만적인 분위기는 결코 쉽게 잊기 어려웠다.


사진) 홍콩섬 주변 작은 섬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던 곳 중 한 곳의 모습(2013. 11월)


그런데 이렇게 낭만적으로만 보이는 섬들이 실제 알고 보면 과거에는 너무도 끔찍하고 무서운 역사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이곳의 크고 작은 섬들은 사실 과거 한 때 잔인하기로 악명을 떨쳤던 중국 해적들의 근거지였던 것이었다. 화려한 국제공항이 들어와 있는 란타우섬도 과거 해적 근거지였고, 또 인근에 있는 청차우섬의 유명한 빵 축제는 원래 그 섬의 해적들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귀신에게 빵으로 제사를 드리던 관습에서 시작된 축제라 한다.


(귀신을 달래는 청차우섬 빵 축제)

1. http://weeklyhk.cafe24.com/news.php?code=issue&mode=view&num=18928

2. https://blog.naver.com/hktb1/220356057505


실제 이러한 섬에 가보면 은신처나 보물들을 숨겨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동굴도 꽤 많았는데, 그래서 유독 이 근처의 섬들이 해적들의 근거지로 사용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라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와 이름이 매우 비슷해서 헷갈리기 쉬운 '청포차이(張保仔)'라는 해적이 은신처로 사용했다는 동굴도 청차우섬에는 남아있는데, 청포차이는 한때 보유한 선박이 600여 척에 수하 병력만 5만 명이었다 하니 얼마나 큰 해적 집단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청포차이 동굴)

https://blog.naver.com/hk_news/150084976338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 홍콩 일대의 해적은 오래전 과거 역사 속 기록으로만 남아있고 그들이 수많은 보물들을 감춰 두었다는 섬의 동굴이나 해적질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던 행사는 이제 관광 상품이 되어 매년 많은 관광객들을 지속 끌어들이는 장소와 행사로 바뀌었다.



■ 아편으로 성장한 홍콩의 어느 대기업


어느 날 법인의 거래선 중 하나와 미팅을 할 일이 있었는데, 명함을 보니 거래선 이름에 'Jardine'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아 나중에 검색해 봤더니 역시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홍콩에 본사를 두고 있는 대기업들 중에는 'Jardine'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19세기 William Jardine이라는 영국인이 홍콩에 설립한 회사인데 이 회사는 각별한 과거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1830년대부터 중국에 엄청난 아편을 팔아 중국과 중국인들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그 대가로 매우 큰돈을 번 영국 회사가 바로 이 회사였던 것이다.


(아편과 Jardine 그룹)

1. https://blog.naver.com/ericeksun/70118150633

2.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Jardine_Matheson_%26_Co.


그런데 사실 이 회사는 돈만 벌었던 것이 아니라 영국으로 하여금 아편전쟁을 일으키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나라 임칙서에 의해 자신들의 아편이 몰수당하자, 아편을 팔던 William Jardine은 영국 정부에 로비를 해서 아편전쟁을 일으키도록 사주했던 것이다. 당시 그가 전쟁이 필요하다고 작성했던 기록 원본은 없어졌다 하지만 현재도 Jardine Paper라 불리며 그 내용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Jardine Paper)

https://en.wikipedia.org/wiki/Jardine_Paper


언젠가 영국의 아편 장사와 관련된 Jardine이라는 이름을 얼핏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거래선 명함에 그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 기억을 더듬어 다시 찾아보니 역시 그 회사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 아편을 팔아서 그 돈으로 성장한 기업임에도 이 기업은 비난받아 이미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46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고 그 본사 또한 중국 영토인 홍콩에 버젓이 있었다.


(홍콩섬 도심에 있는 Jardines 그룹 사옥)

https://goo.gl/maps/CYdC6GvmKktcf3RB7


수많은 중국인을 아편쟁이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전쟁까지 일으켜 많은 중국인들목숨을 앗아갔으며 홍콩 등 중국의 영토까지 빼앗긴 원인을 제공한 기업이 그로 인해 도산하지 않고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에도 오히려 더욱 성장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바로 그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던 홍콩에서 말이다....


Jardine 그룹의 홈페이지에서는 그런 과거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찾아봤는데, 창업 시점부터 기업의 오랜 역사를 설명하면서도 아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 단순하게 '차(Tea)'를 중국에서 영국으로 수출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만 기술되어 있었다. 그 차를 사기 위해 인도에서 아편을 들여와 대량으로 중국에 팔았다는 내용은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Jardines 그룹 홈페이지 역사 부분)

https://www.jardines.com/en/group/history.html




다음 편 "5. 홍콩 야사(野史) (2-2)"로 이어짐....

keyword
팔로워 270
이전 03화홍콩의 두 얼굴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