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야사(野史) (2-2)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7편 HK, Macau-05)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Hong Kong, Macau



5. 홍콩 야사(野史) (2-2)


전편 "4. 홍콩 야사(野史) (2-1)"에서 이어짐...




■ 7살 송나라 마지막 황제의 비극


960년에 건국됐던 중국의 송(宋) 나라는 몽고족이 건국한 원나라에 의해서 1279년 3월에 멸망했다. 그때 송나라의 마지막 황제도 사망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 황제는 당시에 불과 7살이었던 '소제(少帝)'로 나타난다. 소제는 사망하기 1년 전인 1278년 5월에 황제로 즉위했으니 즉위 후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소제가 황제로 즉위했던 장소는 송나라의 화려한 황궁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홍콩의 일부이며 이제는 홍콩의 쳅락콕 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는 란타우섬이었다. 원나라의 끊임없는 추격으로 송나라의 어린 마지막 황제는 가신들에 이끌려 중국 최남방의 이곳 홍콩 란타우섬으로까지 도주해 와서 황제 즉위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사진) 란타우섬 중앙 산악 지대 모습 (2013. 11월)


사진) 란타우섬의 쳅락콕 국제공항 (2008. 9월)


그리고 황제 즉위 후 벌어진 마지막 '애산(崖山)' 전투에서 송나라가 결국 원나라에 패하자 7살 황제는 끝까지 자신을 보위하던 신하의 품에 안겨 함께 바다에 빠져 자결을 했다.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들은 황제의 어머니인 양태후도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이어서 수많은 신하들도 그들을 따라서 자결했다.


자결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000여 척에 달하는 선박에 있던 수십만의 송나라 병사들도 원나라의 공격으로 학살되거나 바다에 빠져 죽었다. 원나라 측 기록에 의하면 전투가 끝난 다음날 바다에 떠오른 송나라 병사들 시신만도 10만 구가 넘었다 한다.


5대 10국의 분열과 혼란을 정리하고 통일 왕국을 수립해서 화려하게 시작한 송나라도 319년 만에 이렇게 비극적으로 중국 남쪽 끝 홍콩 인근 바다에까지 쫓겨와서 그 끝을 맺게 된 것이다. 그때 송나라의 어린 황제가 신하 품에 안겨서 바다로 몸을 던질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있는데, "결단코 두 번 다시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라는 것이었다 한다.


철부지 같은 7살 어린아이가 자결했다는 것이 도무지 쉽게 믿기지 않는데, 이제는 글로벌 금융 허브가 된 화려한 국제 도시 홍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송나라의 그런 비극적인 마지막 역사가 사실 홍콩 땅에는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송 소제)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_%EC%86%8C%EC%A0%9C



■ 6.25 전쟁에서 중공군을 지원했던 홍콩인


미국의 시사 잡지 Forbes는 2006년 전 세계 부자 순위를 발표하면서 Henry Fok이라는 홍콩인을 홍콩에서는 7번째 부자로 전 세계적으로는 181번째 부자로 발표한 바 있다. 당시 Forbes가 발표한 그의 재산은 환화로 환산을 하면 약 4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는데 14년 전인 2006년 기준으로 4조 원이었으니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훨씬 더 큰 금액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그에게는 여느 홍콩의 부자들과는 꽤 다른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영국 통치를 받던 홍콩에서 1923년 태어난 홍콩인이었음에도, 한국의 국회 격에 해당하는 중국 본토의 정협(政協) 부주석 자리에까지 오르는 등 중국 본토 공산당 정부로부터 유난히 각별한 대접을 받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가 중국으로부터 그렇게 각별한 대우를 받아왔던 이유는 좀 아이러니하지만 한국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바로 그가 한국의 6.25 전쟁 기간 중 발효된 UN의 대중국 무역 제재를 무시하고 군수품으로 사용될 수 있는 온갖 물자들을 대량으로 중국에 밀수출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당시 중국으로 밀수출한 물자 중에는 무기도 포함되어 있고 바로 이 무기 밀수출 덕분에 그가 본격적으로 재산을 축척하기 시작했다는 소문들도 있었지만, 정작 Henry Fok 본인은 다른 물자의 중국 밀거래는 이미 인정했지만 무기의 거래만은 사망 시까지 끝까지 부인했다 한다.


실제로 무기 밀거래를 했는지 정확한 진실이야 우리로써는 파악할 수 없지만 어쨌든 당시 한반도에서 UN군과 치열한 전쟁을 수행 중이던 중국이 Henry Fok이라는 영국령의 한 홍콩인 무역업자 덕분에 전쟁 중 필요한 물자 상당 부분을 보충받을 수 있었던 것만은 그와 중국 정부 모두 인정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 정부는 전쟁 기간 그런 밀거래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조상이 거주했던 광저우 일대의 광대한 땅을 그에게 제공하는 등 후한 보상을 했고 또 아래 중국의 언론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사후에도 그를 강한 중국을 만드는데 기여한 인물로 극찬하며 영웅시하고 있는 것이다.


(Henry Fok, 6.25 전쟁, UN 해상봉쇄)

1. https://www.amazon.ca/Fok-Ying-tung-Korean-Paperback-Chinese/dp/7506561344

2.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Fok

3. https://www.chinadaily.com.cn/a/201812/19/WS5c198872a3107d4c3a00184c.html


물론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중국 언론의 기사 내용처럼 그를 조국이 어려울 때 자신의 조국을 위해 충성한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밀매한 바로 그 물자들이 한국군의 생명을 앗아간 중공군의 군수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코 중국과 같은 시각으로 그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러한 관점과는 관계없이 그와 또 그의 자손들은 중국의 전폭적 지원에 의거하여 모두 상당한 부를 구축했고 그 부로 지금도 홍콩의 몇 안 되는 재벌 중 하나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으며 언론에도 선망의 대상으로 수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Henry FOK의 장남은 Timothy FOK이라 불리는 분인데 그는 웬만한 국가의 대통령만큼 막강한 권한이 있다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 즉 IOC 위원으로 현재 활약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뒤를 이어 적지 않은 영화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사진) 홍콩 스포츠 행사에서 축사하는 Timothy FOK (2010. 9월)


(Timothy FOK 관련 기사)

1.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8331

2. http://www.china.org.cn/sports/2018-11/20/content_73892223.htm


또 Timothy FOK의 아들 다시 말하면 Henry FOK의 손자 Kenneth FOK은 40세도 안돼서 이미 홍콩 언론으로부터 재벌로 불려 왔는데, 2012년에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미모의 중국 국가 대표 다이빙 선수인 '궈징징(郭晶晶)'과 결혼하여 홍콩 재벌과 올림픽 미녀 메달리스트의 결혼으로 세간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손자 역시 매우 부러운 부와 영화를 함께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Kenneth FOK 관련 기사)

1.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77/0002874084?sid=104

2. https://www.jaynestars.com/news/celebrity-weddings-guo-jingjing-and-kenneth-fok/


먼 곳에 있는 것으로만 느껴지는 홍콩의 재벌가 3대에 관한 이야기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부가 구축되던 계기는 한국의 비극적 역사와도 이런 묘한 인연으로 얽혀 있는 셈이다.



■ 지속적으로 커지는 홍콩


홍콩 법인은 Wanchai의 Convention Center 앞에 있는 Central Plaza라는 빌딩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로 가려면 도보로도 최소 약 20분 이상은 걸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법인 직원에게 들어보니 현재 법인이 있는 이 건물 일대는 과거에는 바다 한복판이었다고 했다. 정말 의외였지만 바다를 매립하여 육지로 만든 지역에 78층이나 되는 Central Plaza 빌딩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사진) 법인이 있던 Central Plaza 빌딩 주변. 초고층 빌딩 및 울창한 숲이 있는 이 일대가 과거에는 모두 바다였다.


이 Central Plaza 건물 뒤쪽, 즉 좀 더 홍콩섬 내륙으로 들어가면 Wanchai 경찰서 건물이 있다. 그런데 1932년에 찍은 이 경찰서 사진을 보면 경찰서 건물 앞이 온통 물이다. 당시에는 건물 바로 앞이 바다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같은 장소를 찍은 2008년도 사진을 보면 경찰서 건물의 전면이 택시들이 다니는 멀쩡한 도로로 변해있다. 결국 그 사이에 이 일대에 대한 매립 공사가 있었고 그 위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선 것이었다.


(1932년 찍은 Wanchai 경찰서 건물)

https://en.wikipedia.org/wiki/Old_Wan_Chai_Police_Station#/media/File:Wan_Chai_Police_Station_1932.jpg

(2008년 찍은 Wanchai 경찰서 건물)

https://en.wikipedia.org/wiki/Old_Wan_Chai_Police_Station#/media/File:Old_Wan_Chai_Police_Station_01.jpg


현재 법인이 있는 건물보다 훨씬 내륙에 있는 경찰서 앞도 이처럼 바다였으니 법인이 있는 건물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직원 말 그대로 정말 바다 한복판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그 직원의 말을 듣고 좀 더 검색을 해보니 홍콩에는 의외로 해안가의 바다를 매립하여 육지로 만든 지역들이 꽤 많이 있었다. 1900년에 완성된 홍콩섬 Central 지역 매립 사업 때도 24만 m2의 육지가 새로 생기기도 했는데, 현재 홍콩 유명 관광명소로 한참 내륙에 위치한 것처럼 느껴지는 Hong Kong Club, Supreme Court, Statue Square 등 건축물도 사실 이 매립 사업을 통해 바다가 매립된 이후 그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Supreme Court 등이 있는 곳의 현재 모습)

https://goo.gl/maps/H3DhsiZ6pNb6zV5z8


1998년에 현재의 쳅락콕 홍콩 국제공항이 새로 완공되기 이전까지는 홍콩 도심 한복판에 있었던 구 Kai Tak 공항이 홍콩의 유일한 공항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공항 역시 바다를 매립한 후 그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


한편 이 Kai Tak 공항은 워낙에 좁고 또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인 구룡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 이착륙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공항 중의 하나로 전 세계의 조종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다. 아래 링크 사진을 봐도 항공기가 마치 도심 건물 사이를 통과해서 이착륙하는 것 같은 그런 아찔한 모습이다.


(1960년대 Kai Tak 공항 모습)

https://www.airporthistory.org/kai-tak-photo-special.html

(과거 Kai Tak 공항의 항공기 이착륙 모습)

1. https://www.aerotime.aero/aerotime.team/21618-whoosh-remembering-kai-tak-hong-kong-s-controversial-airport

2. https://www.youtube.com/watch?v=UyU9OLqQ8XA


나 역시도 1998년 Kai Tak 공항이 폐쇄되기 직전 홍콩에 출장 갈 일이 있어 이 공항을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번 이용했던 적이 있는데 애당초 항공기를 좀 무서워했던 데다가 비좁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공항 모습을 항공기에서 내려다보니 더 겁이 나서 착륙 과정 내내 꽤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있다.


한편 홍콩의 이러한 매립사업은 앞으로도 지속될 예정이라 하는데 기술이 그만큼 더 발전해서 그런지 그 규모도 점점 더 대형화되는 추세인 것 같다. 언젠가 구룡과 홍콩섬 사이 빅토리아 만까지 온통 매립돼서 혹 홍콩섬이 구룡반도와 붙어있게 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기 매립된 지역과 매립 예정 지역, 링크 중간 부분 지도)

https://discovery.cathaypacific.com/hong-kongs-land-reclamation-past-present-future/

(바다 매립 인공섬 조성 계획)

http://www.e-hanaro.com/?mid=guide&page=9&document_srl=1166554



■ 기관총, 지뢰, 폭탄까지 사용된 '67 폭동'


2020년에도 홍콩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여러 차례 발생했던 바 있다. 1960년대에도 홍콩에는 그런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바로 영어로는 '67 Riots'라고 표현되는 67 폭동이다.


한편 이 67 폭동은 최근의 시위와는 꽤 큰 차이가 있었는데, 우선 최근 시위가 반중국 시위인 반면 당시 시위는 친 중국 시위였고, 또 시위 방식이 차원이 달라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기관총, 지뢰, 폭탄 사용되는 전쟁에 준하는 그런 시위였다는 것이다.


홍콩에는 산포콩(San Po Kong)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한글로 표기하면 홍콩의 '콩'과 산포콩의 '콩'이 모두 같은 글자지만 한자로 산포콩은 新蒲''으로 홍콩의 香''과는 다른 한자다. 이곳은 특별히 관광할 곳이 있는 그런 지역은 아니었고 주변지역보다는 꽤 낙후돼 보이는 지역이었는데, 이곳에 있는 거래선 매장에 가야 할 일이 있어 홍콩 근무 시 몇 차례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전술한 67 폭동은 바로 이곳 산포콩 지역에 있는 한 조화(造花) 공장에서 최초로 시작이 되었다. 그 당시 홍콩 대부분 공장에서는 친 중국 성향의 노조원과 고용주 사이의 노사문제로 이미 갈등이 상당히 고조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산포콩에 있던 바로 이 공장에서 결국 터지게 된 것이었다. 노조원들의 시위에 경찰이 개입됐고 노조원들이 체포되자 더 큰 시위대가 몰려오는 이런 방식으로 시위 규모가 점점 더 확대되고 격화되어 나중에는 시위대가 폭탄도 사용하는 폭동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이었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친 중국 시위대는 중국의 홍위병처럼 마오쩌둥 어록을 한 손에 들고서 친 중국 구호를 외치기도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시위에는 홍콩인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무기를 들고서 무단으로 월경한 수백 명의 중국인들도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로 인해서 폭동은 훨씬 더 격화되었고 결국 5월에 시작된 폭동이 그해 12월까지 무려 8개월이나 지속됐다. 그리고 그 기간 폭탄 공격으로 15명, 경찰의 사격으로 22명 등, 총 51명의 인명 상실이 있었고, 832명이 부상당했으며, 체포된 시위대만도 5천여 명에 달했다.


중국 공산 정권에 저항하는 최근의 홍콩 시위에서는 영국의 국기가 휘날리고 심지어 중국 공산당 통제를 받느니 차라리 영국 식민 통치를 다시 받자는 그런 구호까지도 등장한다. 하지만 과거 50여 년 전 1960년대 말 시위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친중국적인 매우 과격한 극렬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홍콩 시위에 등장한 영국 국기)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6/06/23/2016062300059.html


산포콩의 매장을 다니면서 홍콩의 그런 아픈 역사를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자본주의와 재벌들천국과 같이 보이기만 했던 홍콩에도 그런 반 자본주의적이고 친 중국적인 대규모 소요가 과거 한때 있었다는 사실이 꽤 새삼스러웠었다.


(67 폭동 관련 기사)

https://www.nytimes.com/2019/09/16/world/asia/hong-kong-1967-riots.html

(67 폭동 당시 동영상, 03:01)

https://www.youtube.com/watch?v=kNYWsoNC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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