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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지 못한 장밋빛 인생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7편 HK, Macau-32)

by SALT

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Hong Kong, Macau



32. 꽃 피지 못한 장밋빛 인생


홍콩 법인에서 5년 반 근무했다. 이 땅에서 100년을 넘기며 사는 경우가 좀처럼 흔하지 않은 인간의 수명에서 볼 때 결코 짧지만은 않은 기간이었는데, 5년 반의 귀한 시간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던 회사 일에 빠져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또 한편으로는 주재원이 아니라 한 명의 자연인으로 그리고 미혼남으로 여인들과 데이트했던 아름다운 추억들도 있었다.


그런 여인들 중에는 국제결혼하는 것까지도 나름 진지하게 고려했던 여인 역시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홍콩에서의 그 여인들과의 만남은 모두 꽃 피지 못한 장밋빛 인생처럼 인연으로까지는 연결되지 못했다.




C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중국 본토 소수 민족인 우리 동포 조선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홍콩으로 유학 와서 홍콩에서 대학을 다녔고 또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홍콩에 거주하며 직장 생활을 이어왔다. 결국 학창 시절부터 계산하면 살아온 인생의 약 반 정도인 15년 정도를 홍콩에서 거주해 오고 있었던 셈인데, 그렇게 오래 홍콩에 거주해서 그런지 홍콩 언어인 광둥어도 꽤 유창하게 구사했었다.


통상 중국 본토 출신으로 홍콩에서 직장 생활하는 중국인을 보면 홍콩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자연스럽게 광둥어를 어느 정도는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광둥어를 말할 수 있는 본토 중국인은 좀처럼 보기가 어려웠다. 광둥어를 좀 알아듣기는 해도 광둥어로 직접 말하는 것은 그만큼 훨씬 어려웠던 것 같은데, 그녀의 경우는 어린 나이에 홍콩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말하는 것까지도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한편 그녀와 만날 때에는 때로는 좀 혼란스럽기도 했었다. 그녀에게는 3개의 서로 다른 민족적 정체성이 섞여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녀는 조선족이었으니 우리와 같은 민족이었고 또 썩 유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어도 어느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와 만나 시간을 보낼 때는 나와 같은 한국인과 함께 있다는 느낌이 자주 들곤 했었다. 결국 그녀 역시 한민족이라는 것이 그녀의 첫 번째 정체성이었다.


중국 거주 조선족 경우 과거에는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족이 꽤 많았다 한다. 하지만 신장, 만주, 몽고, 티베트 등 중국의 대다수 소수민족 지역이 빠르게 한족화 되어가는 것처럼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연변 포함 동북 지방 역시 급속히 한족화 되어 요즘에는 과거와는 반대로 젊은 조선족 경우에는 오히려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녀 역시 그런 경우에 해당돼서 그녀가 구사하는 4가지의 언어, 즉, 중국 표준어, 광둥어, 한국어, 영어 중 한국어 구사 능력이 가장 낮았다. 그녀 말에 의하면 자라면서 집에서도 가족들과 한국어로 대화했던 적이 거의 없었고, 홍콩에 와서야 한국인 친구와 자주 만나게 되면서 한국어를 점차로 배우게 되었다 하니 당연히 그녀의 한국어 구사 능력이 가장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와 같은 동포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국적은 엄연히 중국인이었으며 실제로 중국에서 태어나고 10대 중반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자연스럽게 중국인 정서가 상당 부분 몸에 배어 있기도 했다. 특히 중국의 산아 제한 정책 결과로 독자로서 온갖 대우를 받으며 성장해 '작은 황제'라고까지 불렸던 그녀 세대의 특징인 자기주장이 매우 강했다. 가족 누구도 자신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말도 자주 했었다. 결국 그녀도 그 시절 중국 사회 풍조가 온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중국인이었다는 것이 그녀의 두 번째 정체성이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다른 정체성을 느낄 수도 있었는데, 바로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인생의 반 정도가 되는 긴 시간을 홍콩에서 살아왔던 바, 홍콩적인 분위기와 정서 역시 그녀의 언행에는 나름 담기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식당에서 높낮이가 매우 심한 광둥어 악센트로 종업원들과 농담까지도 섞어가며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때는 영락없는 홍콩 토박이로 보이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재 홍콩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1940년대 말 중국 본토가 공산화될 때 홍콩으로 탈출해 온 중국인들이거나 그들의 후손들이라 한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고 보면 대다수의 홍콩인과 C와의 차이는 결국 홍콩에 거주했던 기간의 길고 짧음의 차이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정체성이 다소 복잡하다 보니 그녀와 만나고 있을 때는 병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다중 인격'을 가진 여인과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즉, 한국인, 중국인, 홍콩인 등 3명의 다른 여인들과 번갈아서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중국어가 완전하지 않았고, 정반대로 그녀는 한국어가 완전하지 않았으니 그녀와 대화할 때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섞어가며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면 심지어 영어까지 동원해 총 3개 어를 섞어가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아마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Sha Tin 지역의 전철 Che Kung Temple(車公廟) 역 근처에 살았는데, 이곳은 법인이나 내가 살던 집이 있던 홍콩 중심에서는 좀 먼 곳에 있는 지역이라 사실 나로서는 별로 가 볼 일이 없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게 된 이후에는 헤어질 때 그녀를 바래다주면서 이따금 방문하게 되었다.


사진) Che Kung Temple 근처 그녀가 살던 동네 아파트 모습. 전형적인 홍콩의 한 여름 주택가 모습으로 작열하는 홍콩의 열기가 새삼 느껴진다. (2011. 8월)


(두 번째 사진 동일 장소 2019. 5월 기준 거리뷰)

https://goo.gl/maps/GPJ7SE8yJLg6D4PD9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딤섬집으로 한국에도 그 분점이 몇 개 있는 '딘타이펑(鼎泰豐)'이라는 딤섬집이 있다. 이 식당은 현재 전 세계에 매장을 갖고 있지만 원래 대만에서 시작된 딤섬집으로 본점은 대만에 있었다. 하지만 홍콩 부임 직전 정작 대만 법인에 2년간 근무할 때는 나는 대만에 이와 같은 맛있고 유명한 딤섬집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홍콩에 부임한 후 우연히 이 딤섬집 홍콩 지점에서 처음 집 딤섬을 먹어 보고는 그 맛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딤섬집의 홍콩 매장을 가게 된 계기도 사실 C가 이 딤섬집을 소개해 주었던 덕분이었다. 의외지만 대만에는 채식이 매우 발달해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 딤섬집에는 돼지 같은 육고기로 만든 딤섬도 물론 있었지만 오로지 해산물과 야채로만 만든 딤섬 메뉴도 꽤나 다양하게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돼지고기가 들어간 딤섬을 전혀 못 먹었던 나를 배려해서 그녀가 바로 이 딤섬집에서 식사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었다.


그녀 덕분에 처음 가 본 곳이 또 있었다. 바로 그녀가 졸업한 대학이며 홍콩의 최고 명문 대학 중 하나라는 '중문(中文) 대학교'였다. 중문대학 캠퍼스에 들어가는 것이야 혼자서도 사실 언제나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주말 데이트 코스로 그녀와 함께 가는 경우가 아니었다면, 해외 법인의 노총각 법인장이 혼자서 홍콩 북부 그 먼 곳에 있는 중문대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문대 출신인 그녀와 데이트를 하게 된 덕분에 홍콩의 유명 대학까지 구경할 수 있었던 셈이다.


중문대 캠퍼스에 가 보니 역시 캠퍼스 규모도 매우 컸고 또 인상적인 공간도 많았다. 그렇지만 당시 캠퍼스 여기저기를 찍었던 사진들은 거의 분실하고 현재 남은 사진은 아래 사진 딱 한 장이다.

이 사진은 교수용 아파트 옆에 있던 작은 인공 호수에 물이 끝까지 꽉 차 있던 모습인데, 인공 호수가 다소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면서 찍은 아래 사진은 호수의 한쪽 끝이 마치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인공 호수와 바다와의 거리는 약 500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말만 들어도 오래된 과거 청춘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설레는 곳이 대학 캠퍼스인데 호수가 있고 아름답고 푸른 바다까지도 보이는 곳이 중문대 캠퍼스였으니 그날 그 공간에서 보냈던 기억들은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는 그러한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사진) 중문대 캠퍼스에 있던 아름다운 인공 호수 모습. 실제 호수는 사진 중간 아래 부분이며, 섬들이 보이는 윗부분은 멀리서 보이는 홍콩 바다였다. (2011. 7월)


그녀와 함께 그녀가 학창 시절 자주 식사했다는 구내식당에 들어가서 나 역시 오래전 학창 시절의 구내식당을 회상하며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때 마침 그 넓은 식당 안으로 참새 한 마리가 날라 들어와 우리들이 식사하는 곳 옆에서 마치 부스러기 음식이라도 달라는 듯한 자세로 서성이기도 했다.


건물 내부로 이따금 비둘기가 들어오는 것은 봤지만 사람을 잘 피하는 참새가 식당 안으로까지 들어온 것을 경우는 좀처럼 없어서 그 사진을 찍어 두기도 했는데 아쉽지만 그 사진도 역시 분실했다. 하지만 중문 대학을 소개하는 아래 블로그에 보니 반갑게도 맨 마지막 사진에 내가 봤던 것과 똑같이 참새가 식당 안으로 들어와서 서성이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나도 직접 봤고 이분 사진에도 같은 모습이 찍힌 것을 보면 필경 중문대 참새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 뭔가를 주워 먹으려 했던 것은 꽤 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중문대 관련 블로그)

https://m.blog.daum.net/donghong/1444?np_nil_b=-1


나른한 휴일 오후 주말이라 인적이 드문 대학 구내식당에서 그녀와 함께 식사하면서 건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은 햇살과 참새까지 구경을 하고 있으니 번잡한 회사일에서 싹 벗어나 아련한 회색빛 기억 속의 과거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나른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정말 너무 삭막했던 직장 생활에서 오랜만에 전혀 다른 인생을 다시 살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매우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 보기도 했었다. 그녀 집이 있는 Sha Tin 지역에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도 있었는데 그녀가 같이 타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해외에 주재 나와서는 처음 자전거를 타 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전거를 빌리면서 담보로 맡겨놓은 신분증은 이미 오래전에 유효기간이 만료된 대학 재학 시절 학생증이었다. 그녀는 그 신분증은 그렇게 담보로 사용할 용도로만 가지고 다닌다 했는데, 신기하게도 자전거 대여점 주인 역시 분명 예전 학생증인 것을 알았을 텐데도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그 학생증을 담보로 자전거를 대여해 주었다.


어쨌든 그녀 덕에 홍콩에서 자전거를 타 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는데, 사방이 온통 짙은 숲의 초록으로 가득 차 있던 Sha Tin에서 자전거를 타고서 질주했던 그때의 그 느낌은 지금도 너무도 상쾌했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진) Sha Tin에서 자전거 탈 때 그녀 모습 (2011. 7월)


홍콩은 홍콩섬, 구룡반도, 신계 등 3개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고 영국 식민지가 된 시점도 세 지역별로 달랐다. 그런데 인구 밀도가 높은 홍콩섬이나 구룡반도와는 다르게 신계 지역은 비교적 면적이 넓고 인구 밀도 또한 낮아서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출퇴근 등 원거리를 이동 시에는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즉, 크게 부족한 주차 공간, 높은 차량 유지 비용 등 문제로 자가용 보급률이 현저하게 낮았던 홍콩에서는 신계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전철이 핵심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전철이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보니 상가 또는 아파트 등 대다수 공공시설들 또한 대부분 전철역 바로 옆 아니면 전철역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밀집되어 있었다.


그녀가 거주하고 있던 Sha Tin 지역도 역시 그러한 신계에 속한 지역이라 마찬가지로 전철역 인근 지역에 많은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Sha Tin 역에는 New Town Plaza란 대형 쇼핑몰이 전철역과 붙어 있었다. 홍콩인들은 주말에는 이런 대형 쇼핑몰 안에서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무더운 아열대 지방 홍콩에서 하루 종일 시원한 냉방도 즐길 수 있고, 또 식당, 커피숍, 다양한 오락 시설에 마트까지 거의 모든 것이 쇼핑몰 안에 있으니 그런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서울에서도 더운 여름에는 백화점 같은 곳에서 주말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New Town Plaza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ourjay&logNo=221100172520&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


그녀와 나 또한 주말에 Sha Tin에서 만나면 역시 이 쇼핑몰 안에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는 등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밖이 너무 더우니 웬만해서는 쇼핑몰 안의 그 시원한 냉방의 유혹을 뿌리치고서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정반대 경우도 있었다. 캐나다 법인에 근무할 때인데 부임 직후 한겨울 주말에 거리로 나가 보니 텅 빈 도시처럼 사람들이 전혀 보이질 않아 꽤 의아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날이 너무 추우니 사람들이 모두 쇼핑몰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근처에 있던 Square One이라는 초대형 쇼핑몰 안에 들어가 보니 실제로 텅 빈 거리와는 전혀 다르게 도처에 수많은 인파가 가득했다.


너무 더워도 또 그와 반대로 너무 추워도 사람들은 냉방과 난방이 잘 가동되는 쇼핑몰로 몰리는 셈이었다.


(Square One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race_beck&logNo=220728902233&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


사진) New Town Plaza에 있던 중국 식당과 식당가 모습. (2011. 8월)


식사는 보통 쇼핑몰 안에 있던 중국 식당에서 했는데, 나는 주로 새우튀김을 주문해서 먹었다. 새우 자체도 맛있었지만 소스 맛이 너무도 좋았다. 물론 중국 음식들 경우 조미료가 워낙 듬뿍듬뿍 사용된다고 하니 어쩌면 소스 맛의 대부분은 조미료 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와의 관계는 약 1년여 만에 서서히 파경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외동딸로 홍콩 유학도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주장대로 관철시켰다는 것처럼 그녀는 '작은 황제' 세대답게 본인의 주관이 매우 뚜렷한 여성이었는데, 문제는 나 역시 당시에는 모든 면에서 그녀에게 지지 않을 만큼 주관이 뚜렷했던 것 같고 결국 서로의 그런 성향으로 부딪히는 일이 잦아지게 되면서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사내 연애는 말도 많고, 소문도 많아서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끌리는 이성이 굳이 하필 사내에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 연애를 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법인 동료 직원에게 이성으로서의 묘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사적 감정이 공적 업무로까지 연결되는 문제를 야기하지만 않는다면 미혼의 법인장도 당연히 한 자연인으로서 이성을 만날 권리가 있을 것인데 오로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처럼 소중한 기회와 권리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고 믿었 때문이었다.

법인 직원 중에는 D라는 직원이 있었다.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녀의 성은 홍콩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중국인 무술가 '엽문(葉問)'과 같은 '엽'씨였는데, '葉'이란 한자의 한국어식 발음은 '엽'이었고, 중국의 표준어 발음은 'ye(예)'지만, 광둥어식 발음은 'ip(입)'이었다. 따라서 엽문도 표준어 발음은 'Ye Wen(예원)'이지만 홍콩에서는 광둥어 발음 기준으로 "Ip Man(입만)'이라고 불렸다.


같은 한자의 발음이 엽, 예, 입 등으로 한국, 중국 북방, 광둥 각 지역별로 묘하게 다른데, 한국 발음은 광둥 지역 발음과 유사한 경우가 많았다. 중국 북부 지역 경우 몽고족, 만주족 등 북방 민족과의 빈번한 교류로 발음이 많이 변해온 반면, 한국이나 광둥 지역 같은 중국 남부에는 고대 한자 발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 한다.


그녀는 안내 데스크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는데 이직률이 꽤 높은 곳이 홍콩이었지만, 그녀 경우는 내가 홍콩에 부임할 때부터 홍콩을 떠날 때까지 5년 반이나 이직하지 않고서 그 자리에서 근무했다. 결국 그녀와는 5년 반이나 되는 꽤 긴 시간 동안 거의 매일 회사에서 만났던 셈이다. 다만 그녀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부임 후 약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점심 또는 저녁에 다른 직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그녀와 식사를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여러 명이 함께한 식사였고, 퇴근 후 단 둘이 만나서 처음으로 같이 식사를 했던 것은 3년 정도가 지난 후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시절 내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재원, 홍콩인 구분 없이 법인의 웬만한 간부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물론 구체적이고 사적인 내용은 당연히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주재원들에게는 솔직하게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은 털어놓기도 했었고, 워낙에 그녀에 대한 내 언행이 눈에 띌 만큼 달라서 그러기도 했던 것 같다. 한편 그녀에 대한 나의 그러한 감정에 대해 그들은 잘해보라고 격려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겠지만, 홍콩 포함한 중국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지역 본부 사장님도 홍콩에 출장을 오시면 홍콩인 간부나 주재원 구분 없이 정색을 하시고 법인장 장가보내지 못하면 당신들이 혼난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는데, 아마 그 말을 더는 듣기 싫어서라도 그렇게 응원을 했던 것 아닌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느 해인가 연말 송년회 할 남녀가 같이 춤추는 시간이 있었는데 홍콩인 Director들이 공개석상에서 나와 D에게 함께 춤을 추라고 꼭 집어서 노골적으로 지명을 하는 바람에 꽤 당황했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그러한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던 나와는 달리 정작 D는 그런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아 송년회처럼 수 백 명이나 되는 법인 직원 모두가 함께한 자리에서도 마치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네기도 했었다. 그럴 때에는 주변의 시선이 불편해서 내가 슬쩍 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당시 나는 조금 일찍 출근했었는데 출근하면 우선 메일들을 간단히 훑어보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약 20분간 산책을 한 후 출근 시간에 맞춰 다시 회사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돌아올 때는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무실 근처에 있던 Pacific Coffee라는 곳에서 주스와 과자 등을 사서 안내 데스크에 있던 그녀에게 전달해주곤 했었다.


(매일 아침 주스를 구매했던 Pacific Coffee)

https://www.openrice.com/en/hongkong/p-pacific-coffee-p587138


다른 직원들 경우 출근 후 커피나 주스 같은 음료를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법인 건물 1층에 있던 커피숍에 가서 사 올 수 있었고 또 실제 그렇게 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하지만 D 경우는 안내 Desk에서 혼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았고 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다른 직원들에게 잠시 대신 자리를 지켜달라고 부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 주스나 과자와 같은 간단한 스낵을 대신 사서 전달해 주기 시작했던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었다.


사진) 안내 Desk 본인 자리에 앉아 있는 D의 모습. 바로 이 자리로 매일 아침 주스와 과자를 배달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관행이 되다 보니 결국 아침에 그렇게 내가 배달하는 간식은 그녀의 간단한 아침 식사처럼 되어 버렸고 그녀도 이제는 매일 아침 음료와 과자 받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홍콩 사람들은 날이 너무 더워 그런지 일반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와 저녁에 식사 겸 와인 한잔할 때는 와인 한 병을 거의 대부분 내가 마시곤 했는데, 한 번은 식사 후 전철을 타고 그녀를 집 근처로 바래다줄 때 술김에 용기가 생겼는지 혹 한국에 가서 살 생각도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답은 자신도 언젠가 한국 같은 곳에 가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내 질문 의도를 알았을 텐데 그런 답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그 답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얘기를 이어가지는 못했고, 그렇게 그 일은 흐지부지 흘러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귀국 후에는 이제 서울과 홍콩에 각각 떨어져 있다 보니 만날 기회도 없었고 뭔가를 더 이어가기도 어렵게 되어 그녀와도 점차 멀어져 갔다.


사실 되돌아보면 홍콩에서 근무하던 기간 주변의 시선 눈치 보지 않고 최우선적으로 그녀에게 좀 더 확실하고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했어야 했다. 일이 성사가 되던 안되던 그렇게 해서 분명한 결론을 좀 더 일찍 맺었어야 했는데, 우물쭈물 지체하다 보니 결국 그녀와는 애매한 관계만 지속되었던 것 같다.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는 그녀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으니 그녀를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놀랍게도 어느 날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친구와 둘이 서울에 여행을 가려는데 서울에서 만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웠고 당연히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그녀와 다시 만나 북촌 등 관광 명소를 함께 구경 다니기도 했었 저녁에는 홍콩에서 그랬던 것처럼 북촌 인근 레스토랑에서 역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친구가 함께 있어서 서울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금깊은 대화로는 연결할 기회는 갖지 못한 채 그녀는 서울 일정을 다 마치고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녀가 돌아간 후 약 1년 지나서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녀와의 장밋빛 인생 또한 그렇게 꽃 피지 못한 채 마침내 끝을 맺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한국에 왔을 때가 뭔가 전기를 만들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던 것 같은데 무능하고 미련한 바보는 마지막 기회까지도 허망하게 놓쳐버린 것이다. 내 과거 인생은 결국 주어진 그렇게 많은 기회를 반복적으로 놓치며 사는 것의 연속이 아닌지 모르겠다...



G라는 직원도 있었다. 그녀는 주재원의 아파트 임대나 출장 등을 지원해 주는 업무를 담당했던 직원이라 주재원들과의 접촉이 가장 많았던 직원이었다. 나 역시 홍콩에서 4번이나 이사 다니며 아파트를 구하러 다닐 때는 항상 그녀와 함께 다니곤 했었다. 어차피 현지 물정을 잘 모르는 주재원들은 아파트 계약 등은 그녀를 통해서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접촉이 많다 보니 빈 아파트에 단 둘이 있게 되거나 오고 갈 때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 등의 조금 애매한 경우가 생기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다소 묘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나는 D에 관심이 많았던 시절이었고 따라서 G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상의 감정을 갖고 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남자들이 원래 모두 나쁜 놈인지 아니면 나만 유독 나쁜 놈이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뭔가 내가 그녀의 오해를 살만한 말을 분명히 했던 것 같고 이후 그녀는 확실하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갖고 나를 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실 그녀 역시 꽤 미인이었고 게다가 성격도 매우 좋아서 내게는 분명히 과분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당시 D에 워낙에 빠져 있던 시절이라서 D 외의 여성에는 깊은 관심을 갖기가 어려웠었다.


그러던 어느 날 D와 G, 사람 모두를 포함해 약 4~5명이 함께 포도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그랬는지 평소에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던 각자의 이성 친구에 대한 질문이 오고 갔다. 그때 G에게 " 애인은 누구냐?"라고 내가 질문을 했었고, 그녀는 잠시 답을 안 하더니 갑자기 "너자나?"라고 정색을 하면서 약간 감정까지 섞인 답을 했다.


꽤 의외의 답에 참석자 모두 다소 놀랐고 분위기까지 잠시 어색해지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그런 말을 전혀 농담으로만 받아들였던 나는 웃음으로 그 어색한 분위기를 마무리했고 그날의 상황은 그렇게 별 일 아닌 것처럼 넘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당시 그녀가 했던 그 말은 농담이 결코 아니었고 D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가 그녀와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질문했던 것에 대해 깊은 불쾌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홍콩 여인들이 한국 남자를 좋아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한국인이란 한류 배우나 가수처럼 잘 생기고 잘 가꾼 한국인이었고, 나처럼 그런 한국인과는 정 반대의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아저씨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내가 인사권을 갖고 평가하는 사람도 부서장 등 법인의 간부에만 국한됐지 그녀들처럼 평사원이었던 경우는 내가 직접 평가에 관여할 대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즉 내가 법인장, 다시 말해 그녀들에게는 회사 대표였기 때문에 그런 점이 그녀들에게는 나름 점수로 작용했던 것 같다. 사실 남녀 구분 없이 마찬가지지만, 조직 대표라든가, 학교의 선생님이나 선배들은 그러한 조직이나 단체에 속한 일반 구성원들이 볼 때에는 그 사람들의 실제 모습보다 좀 더 과장해서 보게 되는 경향이 나름 꽤 흔하기 때문이다.


G는 법인에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고 약 2년 정도 근무하다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홍콩 경우 이직이 워낙 흔해서 2년 정도면 그리 짧게 근무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쨌든 그렇게 회사를 떠나면서 그녀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녀 역시 내게는 너무도 과분했던 여성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D도 결국에는 잡지 못했으면서 역시 너무도 과분했던 G 마저도 놓친 셈이었다.


미모에 또한 분명하고 맑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만큼 지금쯤 그녀는 그런 수준에 걸맞은 능력 있고 멋진 그리고 또 선한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축복을 누리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사진) 갑작스러운 주재원의 수술로 홍콩 어느 병원에 G와 단둘이 갔을 때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찍었던 사진 (2011. 5월)


홍콩에서도 결국 꽃 피지 못한 C, D, G와 함께 했던 아련한 그리고 영원히 흘러가버린 장밋빛 인생에 대한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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