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MC가 된 그녀
김연주의 큰딸은 대학생이다. 큰딸이 태어나던 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 음지도 따사롭던 오월, 산부인과 분만실에도 오월의 봄빛은 부서지며 쏟아졌건만 분만대에 누운 그녀의 세운 다리는 11월 한기를 맞는 듯 떨고 있었다.
“아이가 거꾸로 있는 데다가 탯줄을 감고 있어요. 수술해야겠습니다.”
자연분만을 위해 12시간을 버텼지만 진통 시간은 그녀의 출산 무용담이 되었을 뿐, 결국 허무한 인공분만으로 첫 아이를 낳게 되었고, 둘째와 셋째를 낳을 때는 인공분만을 선택하는 데에 미련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녀 나이 스물한 살에 겪은 진통으로 나이테 열 줄 정도는 서비스로 얻게 되었으니까.
김연주는 스물한 살에 아이를 낳았을 뿐인데, 드라마에서 봤던 칙칙한 일들이 그녀 주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짧은 치마는 개켜진 모양 그대로 구석기시대 화석이 되어간 대신에, 고무줄 달린 국방색 츄리닝은 그녀의 아름다운 각선미를 모두 숨길지라도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 되었다. 21세기의 스물한 살이지만 해진 옷이라도 편하면 좋다고, 연주는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다. 모유 수유, 천기저귀 삶기, 아이 업고 장보기, 수시로 울어대는 아기 울음에 태연한 척 입술 꾹 다물기. 더 이상 나열한들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봐줄 사람은 없었다. 아이를 낳은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이며, 숙제였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맞이한 숙제.
사실 연주는 결혼 전에 어느 누구보다 젊은 날을 즐기고 있었다. 잘 가꾸어진 각선미에는 당연히 달라붙는 옷을 입는 게 불문율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음악 재능은 밤이면 빛났고 무대를 장악했으니 그녀의 청춘은 장맛비를 맞고도 핀 백합 같았다. 장맛비를 뚫고도 퍼지는 백합 향기 같았던 그녀는 성실한 마을 청년에게 선택받았고, 무엇이든 ‘성실한’ 그는 결국 그녀를 얻고야 말았다. ‘성실한’ 그에게 그녀는 ‘성실한’ 아내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여름철의 백합 향기를 뿜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을 토닥였다. 화석처럼 굳어가는 그녀의 짧은 치마 대신 아이가 흘린 침이 스며들지 않는 국방색 츄리닝에 익숙해지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음악 재능으로 3단 고음 잔소리를 내는 아줌마가 될 줄은 차마 알지 못했다.
2023년 4월 29일 면민의 날이다. 비는 쉬지 않고 내리지만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빠른 82년생 김연주는 이제 국방색 츄리닝을 입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겨우 마흔두 살이고 ‘성실한’ 남편을 ‘성실’하게 내조한 덕에 여유가 생겼고, 브랜드 있는 레깅스 정도는 몇 벌을 돌려 입고 있다. 다만 오래전에 보유하던 각선미는 다소 변화를 맞이했다. 레깅스로 살을 꾹꾹 눌러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앞치마를 두른 그녀에게서 고소한 파전 냄새가 났다. 부모가 물려준 음악 재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이, 언니! 우리 마을에서 파전 드시고 가야지. 어딜 가?”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언니로 불린 사람은 한 명이었는데, 십여 명이 동시에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본부석에서 그러는데, 이번에 부른 진행자에게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
“그래? 큰일 났네. 내빈 소개 끝나면 바로 노래자랑인데 그걸 누가 한대?”
“연주야, 네가 해보는 거 어때? 저번에 보니까 시골 어르신들 응대도 잘하더라.”
“내가 얼마나 소심한데? 시골 어른들 대하는 거하고 무대에 서는 건 정말 다르잖아.”
“아니야, 이번이 기회야. 비가 와서 사람들도 많이 없고, 다들 취해서 실수해도 티도 안 날 거야.”
“아흐, 나 진행 같은 거 못 한다니까?”
역시나 그녀의 목청은 남달랐다. “나 진행 같은” 이 말이 본부석까지 퍼졌고, 평소 그녀를 아는 동네 유지들은 무릎을 탁 쳤다.
“아, 아. 원달롱 마을에 사는 김연주 씨는 지금 본부석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원달롱 마을에 사는 김연주 씨! 급합니다.”
소심한데 거절도 못 하는 연주는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고 본부석으로 달려 나갔다. 희한하게 심장이 들뜨기 시작했다. 백합 향기보다 파전 냄새가 진하게 밴 그녀는 무대로 올라섰고, 낯설지 않은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흡사 뽕짝 박자와도 비슷했다. 쿵작 쿵작 쿵짜라 쿵작!
“안녕하세요, 여러부운! 저는 원달롱 마을에 사는 릴리~킴입니다.”
짧은 치마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20여 년 만에 무대에 오른 그녀는 전혀 소심하지 않았다. 장맛비에도 향을 퍼트리는 백합처럼, 종일 내리는 비에도 그녀의 흥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슬픈 발라드를 부르는 참가자 뒤에서도 연주는 왈츠를 추었다. 박자를 놓친 할아버지 참가자를 위해서는 주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쳐가며 박자를 맞춰줬다. 그녀의 목청이 마이크를 타고 운동장을 가득 메워졌다. 다음날은 이웃 마을 운동장에서, 그리고 그해 가을엔 읍내 공설 운동장에서 ‘빠른 82년생 김연주’는 ‘릴리 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앞치마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