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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아래, 그녀를 그를 믿지 마세요 2

초과근무가 일상인 그가 변했다

by 게으른 산책가 Apr 27. 2023

*일러두기 : 특정 공공기관의 업무를 잘 모른 상태에서 상상하며 쓴 글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마시고 그런가 보다 해주세요.(뿌잉뿌잉)


초겨울에 들어선 요즘, 오 팀장은 칼퇴를 하고 있다. 초과 근무가 일상이던 그였다. 46세 노총각이지만, 평소 열심히 달린 덕분에 체크 남방을 코듀로이 팬츠 안으로 단정하게 넣어 입어도 단추를 여민 데는 팽팽하지 않았다. 구두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오 팀장은 공공기관에 입사한 지 10년 만에 자긍심은 사명감으로 변했고 덕분에 진급도 동기들보다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사명감을 후배에게 대입했다간 ‘꼰대’가 된다는 것도 충분히 그는 알고 있었다. 자잘한 민원도 간과하지 않고,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에 맞춰 그는 직접 회사를 나선 것이다. 골목길마다 가로등은 설치되었지만, 조도가 너무 낮았다. 더 높일 수도 있었으나, 환한 불빛으로 암막 커튼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다며 암막 커튼을 사주지 않을 거면 조치를 취해달라는 민원 탓이다. 그런 민원 발생은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공공기관의 재원이 재원으로 유지되는 비결이다. 그의 사명감의 범위는 범사회적인(혹은 사명감 포식자) 상태까지 이르렀기에 가로등으로써 낮은 조도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청업체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가로등의 높이를 줄이고, 등에 두른 갓은 더 넓게 만들어달라는 주문이다. 오로지 보행자를 위한 밤의 안내자 역할을 할 것이다.


 

저녁을 먹지 않고 나서기로 했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편이지만, 어둠이 모든 걸 가리는 밤이 되면 혼자인 자신이 도드라진다. 그의 저녁 밥상 곁을 아내 대신 소주가 대신해주고 있었다. 소주는 그를 웃게 해 주며, 웃는데 눈물 나게도 해줬다. 아내의 잔소리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동료들에 비하면 소주는 훌륭한 대체물이다. 오늘은 그의 아이디어가 들어간 가로등이 시범 설치된 동네를 걸을 예정이다. 소주야, 이따가 만나자.


 

칼퇴근 덕분에 그는 대도시에 살고 있음을 몸서리치며 깨달았다. 바다 위로 떠올라 숨 쉬는 고래처럼, 직장인들은 이제야 숨을 쉬는지 생동감이 넘쳤다. 생동감의 밀도는 길거리에서 높아만 갔다. 오 팀장은 다시 자신의 마지막 꿈을 상상한다. 다랭이 논마다 심어진 유채화, 그리고 바람, 독일 맥주가 있는 남해에 살리라. 도시의 소란함을 피해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범 설치된 곳을 가려면 지름길은 도로 옆길로 가야 하지만, (구) 가로등과 (신) 가로등을 비교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선명하지 않는 주황 불빛은 그림자마저 흐릿하게 만들었다. 역시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처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사명감에 불이 들어왔다. 아마도 범사회적인 사명감이었을 거다. 주먹을 우지끈 쥐어본다.

 


“휴, 숨차. 뭔 해가 이리도 빨리 떨어지지?”

허하나는 그녀의 집 앞 벤치에 털썩 앉았다. 건강검진을 위해서 걷는 1일 차 티가 팍팍 나는 날이다. 더군다나 어두워진 골목길을 지나느라 달렸더니, 땀까지 났다. 땀이 턱 선을 따라 흐를 때, 웃음은 그녀의 입꼬리를 올렸다. 오 팀장은 힘들어간 주먹에서 힘을 뺐더니, 입이 벌어졌다. 입이 벌어져서 힘이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가로등 아래,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그리고 시범 동네를 가는 계획은 새로운 민원 발생이 해결될 때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그의 죽어버린 연애세포를 살려냈고, 연애세포는 그의 심장을 발랄하게 만들었으니까.


 

여가를 여가답게 보낸 적이 없던 하나였다. 옥상에 넌 이불속으로 바람이 스미고, 뜨끈한 볕에 솜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들뜨게 하는 게 여행이라고 하나의 친구가 말했던가. 건조기에 이불을 넣었다. 이불 말리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다. 그녀는 여행 프로그램을 틀었다. 이번엔 햇살이 눈부신 지중해로 떠난다. 끝까지 보지 못하고, 리모컨으로 겨우 티브이를 끈다. 밀려드는 잠에 이불을 끌어당긴다. 점 같은 빛도 없는 하나의 방, 이불마저도 검은색인데, 눈을 감아도 떠도 검은색이었던 어둠이었다. 이젠 암막커튼이 아니어도 잘 수 있을 거 같다. 하늘빛 지중해보다 ‘음냐음냐’ 맛보는 잠이 그리웠다. 내일은 운동화를 하나 사야겠다.


 

하나는 며칠을 산책했고, 집 근처에 다다를 때는 달리는 게 루틴이 되었다. 날씨는 점점 한기가 더해지는 중이다.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았을 때였나? 입꼬리가 또 올라갔던지 입 근육이 풀리는 걸 느꼈다. 문득 느끼게 된 시선 때문이다. 잠깐 마주친 눈이 어색했는지 그와 그녀는 느리게 움직이던 동작이 부산해졌다. 그녀는 갑자기 운동화 끈에 눈을 떨어뜨렸고, 그는 가로등을 올려다봤다. 그녀와 그, 왜 자리를 뜨지 않는가. 작은 생물에게도 데면데면하는 그녀가 아니던가. 왜, 왜, 왜.

“음... 저는 사거리에 있는 ㅇㅇ공사에 근무하는 사람인데요. 가로등 시범 설치한 곳을 다니고 있었어요. 여기 가로등이 좀 어두운데 불편하진 않으세요?”

“조금 무섭긴 해요. 그런데 더 환하다고 해서 무서운 게 나아지진 않죠(어차피 혼자 사는 여자입니다).”

“그럼, 불편한 점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오 팀장은 명함을 건넸고,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반짝이며 깜빡이며 그것을 수줍게 받았다. 짧게 안면을 튼 그와 그녀는 심장 위치를 확실히 느끼며 헤어졌다. 외투 밖으로 심장이 나올까 옷을 더 여미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이번엔 볼리비아에 있는 우유니 소금 사막 편을 틀었다. 여행 가는 해변에서 점프를 한다. 하나도 점프를 한다. 가슴속에서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다닌다. 주황빛 아래의 그를 내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나는 그토록 귀찮았던 ‘건강검진’ 덕분에 저녁 산책을 했고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그는 결혼했을까, 손에 반지 꼈던가.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걸 알고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꼬리를 무는 밤이다. 캐럴 음악이 어울리는 때니까, 내일은 초록색 곱창 밴드에 빨간 카디건을 입고 출근해야겠다. 바야흐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니까. 그녀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흥분하고서 빨간 카디건(엄마가 사준 옷이지만 처음 입어보는)을 꺼내서 탈취제를 뿌린다.


 

오 팀장은 요즘 점심시간에 부리던 여유도 반납했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그 이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알 것이다. 칼퇴가 목적이다. 아니, 칼퇴를 해야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캐럴 음악이 어울리는 때라서 그는 특별히 초록색 목도리를 둘렀다. 무신론자인 그에게도 바야흐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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