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살고 싶다
멀쩡한 길을 두고 은수는 물길이 마른 수로로 향했다. 바람은 길가에 쌓인 낙엽을 수로로 몰아넣고 마음껏 그 틈새를 오갔다. 잎맥은 주름처럼 남아서 구부정한 실선으로 남았다. 두툼하던 활엽은 달군 맥반석 위의 오징어처럼 바짝 오그라들었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은 밟히는 데로 으스러진다. 바지에 으스러진 낙엽 조각이 들러붙었다. 은수 엄마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따라 걷고 있다. 은수의 표정은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듯, 고요하다.
“은수야, 춥지 않아?”
“...... 엄마, 어제 책에서 알려준 소리를 지금 발로 듣고 있어. 발에서 소리가 느껴져.”
은수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어제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었다. 발로 듣던 소리가 이번엔 책에서 들린다.
“은수야, 심심하지 않아? 이현이 생일 파티 있다는데 거기 안 갈 거야?”
“학교에서 미리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선물도 전해줬어. 엄마, 나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
은수가 다섯 살 때, 전주에서 장수로 이사를 왔다. 새로 사귄 동네 친구 이현이는 은수 엄마와 이현 엄마가 친해지면서 은수와도 첫 친구 사이가 됐다.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이현이는 분홍색 머리띠에 마법봉과 화려한 핸드백을 든 인상과 달리 매우 수줍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은수는 아무런 장식을 달지 않는 단발머리에 치마가 붙은 레깅스를 입었다. 치마가 아니었다면, 단발이 아니었다면, 은수의 성별을 헤아리기 어려웠을 테다. 엄마들끼리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은수와 이현이는 각자 놀았다. 마주 보고 앉았을 뿐, 로봇으로 지구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은수와 마법봉으로 공주로 변신하는 이현이의 대화는 ‘對話’가 아니었다.
“뾰로롱, 노랑머리 변띤!”
“네 머리통을 박살 내겠다!”
“핑쿠 드레스로 변띤!”
“물대포 발사!”
각자의 독백이 흡사 대화처럼 들렸을 뿐이다. 취향이 너무나도 다른 은수와 이현이는 엄마들이 친해져서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점심으로 인스턴트 짜장면을 먹고, 산책하다가 간식으로 붕어빵을 나눠먹었다. 엄마들의 대화는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드디어 물고기는 물을 만나 숨통이 트인 것이다. 그녀들이 쏟아내는 웃음은 드라마의 적당한 배경음악과도 같다. 그 배경음악 덕분에 은수의 로봇이 이현의 눈에 들고, 이현의 마법봉은 은수도 가지고 놀 수 있게 되었으니까. 특히 엄마놀이를 할 때면 엄마 역할의 과열 경쟁이 필요 없는 조합이었다. 병설 유치원을 다니면서 둘은 더 가까워졌다. 엄마들이 더 친해진 이상, 그들 또한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현 엄마 발소리도 알아채고 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현관에 가까워질 때면 바빠지는 이현 엄마니까.
이현이가 싫은 건 아니다. 4학년은 여섯 명이 전부인 작은 학교인데 깔깔깔 웃는 애들보다 미소 짓고 소근 대길 좋아하는 친구들이고, 뛰어놀기보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 잔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한다. 역시 햇살은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이 최고라면서. 로봇을 좋아하던 은수는 친구들이 싫지 않지만, 지루했다.
“엄마, 학교는 너무 심심해.”
“이현이랑 잘 놀면서 뭐가 그리 심심해. 하긴 요즘 이현이가 이모 따라서 놀러 오지 않던데, 너희 싸웠어?”
“걔는 만날 [예뻐지는 비법서] 같은 만화책에만 빠졌다고. 요즘은 블로그에서 체험단 활동 시작했대. 내가 그런데 관심이 있겠냐고.”
“그래도 사이좋게 지내지. 참, 은수야, 외삼촌이 영준오빠가 안 읽는 책들 보내셨어.”
과학 전집과 뉴베리, 칼데콧 수상작 모음 전집이었다. 책을 펼칠 때마다 책은 신음을 냈다. 쩌어억, 오래된 저택의 문을 열 때나 날 법한 소리다. 은수는 책 속에 진열된 문장 속으로 마법처럼 빠져들었다. 학교에서 배운 과학은 감질났다면, 책 속 과학은 은수의 뇌 속에 있는 각기 다른 크기의 여러 톱니들이 맞물려 리듬을 타게 했다. 세계 아동문학상을 수상한 책들은 친구가 적은 시골에 살아도 더는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과 시골은 은수에게 사차원과도 같았다. 여백이 가득한 자연에 책에서 읽은 것을 덧대는 건, 매일 다른 날을 사는 것과 같았다.
“은수야, 운동도 하고 그래야지. 매일 집에서 책만 읽을 거야?”
은수 엄마는 독서와 (공상이 가득한) 산책을 즐기는 딸이 걱정이다. 은수의 톱니는 처음보다 속도를 내고 있느라, 독서와 산책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현 엄마, 아무래도 다시 전주로 이사 가야 할 거 같아. 은수에게 친구도 더 만들어줘서 사회성도 늘리고 학원도 보내던가 해야지. 얘가 책에만 빠졌네.”
“그렇지, 시기를 놓치면 안 되니까. 나는 서운해서 어떻게 해. 종종 놀러 갈게.”
은수는 다시 전주에서 살게 됐다. 소리에도 여백이 없고, 자연을 찾기 힘든 그곳에서. 그녀의 톱니들은 다시 서행하더니, 뚝 멈췄다. 점점 녹이 슬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이 다른 모습으로 말을 걸어온다.
“사차원 같은 너랑 안 놀아!”
무서운 감기 바이러스가 그녀에게 달라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