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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감독 Apr 29. 2019

"저기요. 에디터님 맥락맹인가요?"라는 말을 듣던 날

"충분히 살펴보지도 않고 어떤 행위를 쉽게 악이라 판단하는 조급함은 오만과 게으름에서 오는 것이다. 죄인을 찾아내고는 싶지만 정작 그 범죄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는 수고는 피하고 싶은 것이다."  김종원 <말의 서랍>






한참 일이 손에 익고 재미있게 느껴지던 때였다. 제법 에디팅의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고, 스스로 재미가 느껴져 적당한 보람도 느끼던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해당 글에 맞는 이미지도 적절히 잘 찾아 일명 '찰떡 이미지 찾기 녀'로 회사에서 칭찬이 일색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느 이커머스 기업 대표 인터뷰가 있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오늘은 어떤 새로운 스타트업의 이야기를 듣게 될까. 과연 어떤 대표님일까. 나는 또 얼마큼 그 기업을 잘 대변할 수 있을까. 걱정과 설렘을 안고 출근길 버스에 올라탔다. 그때 브런치 앱에서 알람이 울렸다. 나의 지난 글 <나의 강아지를 시한부로 생각한 죄>의 댓글이 달린 것이다.


나의 글로 인해 아침 출근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며 마음을 새롭게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좋은 글 감사하다는 따뜻한 말들이 담긴 꽤 긴 댓글이었다. 출근 버스에 몸을 싣고 멍하니 그 긴 댓글을 살펴보는데 마지막 "좋은 글 감사합니다."라는 단어의 조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려 쓰는 글은 결코 아니지만, 늘 글을 쓰며 깃들어져 있는 나의 마음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되살피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그리고 무언가를 추억하고 정리해볼 수 있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그런 내게 감사하다니! 온몸이 좋은 에너지로 가득 찼다. 그렇게 씩씩하게 회사로 향해 커피를 한잔 내려와 책상에 올려둔 뒤 업무를 시작했다.




"이 에디터는 맥랑맹인가?"


함께 같은 팀으로 일을 하는 옆님이 다급히 회사 메신저로 "oo님. 이거 빨리 해결 좀요!"라고 보내왔다. 그 링크를 펼치니 모르는 사람의 페이스북 링크가 보내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 보니, 어제 오후에 어느 집필진의 글을 전달받아 에디팅 하여 올리고 갔던 글을 누군가 퍼가서 나에 대한 직격의 말을 서슴없이 업로드 해 놓은 페이지가 보였다.


(이 공간에서 얼마만큼 그 글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야 할지 사실 감이 오지 않는다. 그 일은 나에게 조금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고 여론이 무섭기도 하며 다시 누군가를 불편히 할까 두렵기도 해서이다.)


간략한 내용인 즉, 글의 내용과 맞지 않는 이미지를 가져다 놓았고 그래서 이 글을 편집한 에디터는 맥랑맹이며 어느 특정 성별의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이 에디터가 본 글의 주인에게 이미지 손상을 입히고 있으며 , 얼굴에 침 뱉는 행위를 행하고 있다고. 이 글을 편집한 에디터의 무지를 논했던 그런 저격의 글. 본인의 창조적 오해를 대외적인 공간에 공개한 사건이었다.


당시 그 글을 읽고 난 후 꽤 오랜 시간 심리 변화가 있었다. 일단 맨 처음 "멍함" > "떨림" > "두려움" > "황당함" > "억울함" > "열받음" > "상처" > "우울감" > "주눅" > "회복"의 어마 무시한 여러 단계를 나는 거치게 되었다.





비판과 비난의 차이


그 당시에는 사실 아무런 대처법이 생각나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혹은 무엇을 오해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기 어려웠다. 그저 내 개인의 일이 아닌 회사의 업무에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바로 행해야 하는 액션에 대한 '골든타임'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글을 편집했던 그 에디터고,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드렸다면 죄송하다. 이 글의 이미지는 바로 수정이 되었고 본 글에서 다시 확인하실 수 있다."라는 간략한 답글을 달고는 그 창을 꺼버렸다. 그렇게 날카롭게 변한 내 마음을 데리고 일주일 정도를 어지럽게 견딘 것이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불편함을 겪었다고 하면 그것은 겸허히 그리고 정중히 미안한 마음이다. 그렇지만 나의 의도가 아닌 것에 대한 말까지는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것도 말의 형식이 비난의 형태라면 더더욱.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그리 당황한 점은, 공개적으로 나를 공격한 것 그것뿐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비난이었기 때문이다. 비난의 형식을 취했을 땐 상대방이 상처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꼭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판단이 서려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냉정히 비판을 행하고 싶었던 마음이라면 사실에 근거한 논리를 포함하여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어야 하며,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었던 점을 상대방에게 인지시키고 싶었던 의도의 마음을 솔직한 표현 방식을 선택해 추후 문제 해결의 대안까지 함께 제시해주어야 비로소 건강한 '비판'이 될 수 있다.  


"충분히 살펴보지도 않고 어떤 행위를 쉽게 악이라 판단하는 조급함은 오만과 게으름에서 오는 것이다. 죄인을 찾아내고는 싶지만 정작 그 범죄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는 수고는 피하고 싶은 것이다."  김종원 <말의 서랍>


갑자기 우연히 읽었던, 읽다가 마음에 콕-하고 박혔었던 김종원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어떤 행위를 쉽게 악이라 판단하는 조급함은 오만과 게으름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


나도 혹시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오만하고 게으름의 판단을 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날 이후 나를 제대로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의 실수에 정확한 깨달음을 얻 돼, 비난의 형태에는 상처입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앞으로 내가 실수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면


그 날이 있고부터 자주 비난과 비판 그리고 사과에 대해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단단히 나를 다잡고 회사에서는 묵묵하게 여느 때 보다 더 집중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기업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어 기업의 히스토리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하게 그 기업의 긴 사과문을 읽게 되었다.


누구 특정인 한 명의 잘못이라 인정하기보다는, 회사의 전 책임자들 모두가 서로의 불찰이라며, 진심으로 사건을 설명하고 사과하며 의도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풀어 설명과 반성의 어조로 나열했다. 그러곤 자신의 직업윤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금까지 행했던 진심의 시간들에 대해서도 나열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그 사건의 서두에 대해 말을 꺼내며 오버된 어감 없이 담담히 잘못을 인정했고, 추후 계획도 잊지 않고 언급했다.  


그것을 보고는 사과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당당한 사과는 이렇게나 탄탄한 것이구나 느꼈다.

나도 진정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마음 깊숙이 차오를 땐 저런 당당한 사과를 표하고 싶다.


혹시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어떤 경로로든 상처를 받게 되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상처 받지 않는 삶은 없다. 하지만 상처 받는 것에 대한 선택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에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 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서적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이 주로 타인의 위로를 잘 받을 수 있으며, 반대로 누군가의 아픔도 함께 위로해줄 수 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분은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얼마만큼의 분노로 그렇게 나의 행위를 단번에 악이라 여겼는지. 본인이 그렇게 비난의 형태의 글을 올림으로서 얻는 것은 무엇이 있었을지. 그럼 반대로 나는 지금 어떤 의도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그날 나의 하루는 대조적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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