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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감독 Oct 09. 2019

요즘 내가 사랑하는 잔상들


1. 친구의 폭탄 발언



점심을 함께 하자는 친구의 말에 그날따라 신기하게 내가 만든 음식을 나누어 먹게 되었고, 그날 천진난만 하게 나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며 맛있게 먹던 친구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나왔다.



"나, 생리를 안 해. 두 줄이야"



우린 밥을 먹는 도중이었고, 친구의 폭탄 소식을 꽤나 담담하게 들은 것. 그것이 현 상황이었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구의 영락없는 당혹스러움과 두려움 속에 담긴 표정에서도 미세한 떨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또 다른 인생을 앞둔 설렘이 꼭 나에게만 들킨 친구의 표정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한동안 그 친구의 그런 오묘한 표정이 진하게 남았다.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보면, 난 정말 이 친구보다 어느 면에서도 결코 현명하지 못할 것만 같다. 나의 인생의 큰 틀이 달라지는 일. 내가 나로 사는 것 외 어떠한 역할을 부여받는 일. 앞으로 누군가와의 책임의 고리를 하나 둘 맺어가는 일.


그런 중대한 일들 앞에서 스스로 불안함을 짓누르며, 찬찬히 예비 남편과의 계획을 이어나가는 친구가 그간 보지 못한 어른스러움이 묻어나 낯설기까지 했다. 누구나 나의 인생에 큰 사건을 마주하게 되면, 나는 모르는 표정을 타인에게 들키게 돼 곤 하나보다라고 생각했다.


애기 같은 나의 친구. 친구는 내게 줄곧 문득 차오르는 불안함에 펑펑 울었음을 고백했고,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에게만 들킨 행복 섞인 함축된 표정의 잔상들이 계속해서 남아 떠올랐다. 나도 누군가에게만 들키는 나도 모르는 표정이 있을까? 있다면 좋겠다.






난 친구의 곧 마주할 또 다른 깊은 인생을 진심으로 축복하려 한다. (친구야 나도 좋은 이모가 되어 볼게 ❤)






2. 누군가의 창작물을 소개받던 새벽



"송아씨는 예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렵지 않게 대답을 생각해냈다. 나에게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라는 것.

내가 예술성이 특출나고, (흔히 예술병이라 칭하는) 사리 군별 못하고 어딘가에만 빠져 오롯이 하나의 감정에만 충실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나에게 예술은 가장 이유 없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냥 사랑하게 되는 것. 유독 귀하게만 여기는 되는 것이 예술일 뿐인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창작하는 삶을 살겠다고 스스로 단언했다. 자기표현을 어떤 것으로라도 표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그냥 나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겨왔다. 남들보다 느끼는 것이 많았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생각을 좀 더 하는 일이 잦았고, 나의 감정이 정리된 창작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 빗대어 추억하게 되고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라 여겼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창작물을 보는 일이 내게는 가장 감사했다.


최근 누군가의 창작물을 소개받는 귀한 일들을 자주 마주하고 있다. 나도 나의 창작물을 공개하고 반응을 스스로 체크해야 하는 업의 생태계에 속해 있어,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이 담긴 창작물을 소개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 잘 안다. 그런데 그 새벽녘.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 소개해주는 모습들이 내겐 그저 단순한 것으로 형용하고 싶지 않은, 진한 잔상으로 남아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

음악, 상황의 감정 공유, 시, 문장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에 대한 고민 등 서로를 설명하는 일에 이렇게나 다양한 종류의 것들을 빗대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감사했다. 그 공유의 종류는 꼭 '말'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글과 음악 그리고 시선으로 총합되었다.


순간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무래도 멋지다. (나포함)


아무튼,


'뭉근하고 꾸준한 빛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라는 문장에 한참을 멈췄었던 기억이 나던 진한 새벽이었다.






3. 일이 정말 내 것 같은 요즘



대충 아는 건 진짜 아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는 회사의 일을 대충 알고 했었다. 의도된 대충이었다.


어떤 것에 깊게 마음을 쓰는 일을 좋아하면서도, 굉장히 시작이 어려운 사람이 나다. 그런 나는 내가 어떤 것에 마음을 진중히 쏟아야 하는지 일에서는 정리되지 못했었던 시기였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었다.


현재의 회사 업무에는 창작하는 일을 제외하곤 그저 그런 적당한 마음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흐르는 시간만큼 정말 내 것이 되는 것이 늘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시기는 회사에서 일 년이 지난 무렵 성과 측정에 들어갈 때였다. 내가 나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일에는 겸허히 받아들일 마음이 기꺼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마음을 깊게 쓰지도 않던 이 회사에서 나를 평가하고 측정한다는 게 무척 충격적이었다. (그 시기에 난 난생처음 원인 모를 두드러기에 시달렸다. 몸에서 반응이 온 충격적인 날들)


내가 어딘가에서 자초한 무능은 상관없지만, 이번은 그러고 싶지 않다라는 스스로와의 합의점이 나타났다.


그 후 일을 하나하나 뜯어보았고, 애정을 겸했다. 이 일은 회사의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했던 일들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뜯어보니 정말 내 것(?)같기도한 마음이었다. 일단 그러고 난 뒤 제일 좋았던 것은 일이 재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기했다. 내가 나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 외에 회사에 속하여 이런 창작을 떠난 일 처리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애사심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더라고요"라는 직전 동료의 말이 깊게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일에 집중하다 보니 따라 오는 결과들과 시선들도 많이 달라졌다.


그동안 너무 나 같지 않은 멋없던 일들이었다. 이제는 사랑도 일도 전부 대충 아는 일이 없게 해야겠다. 물론 집중도를 위해서 우선순위는 늘 중요하지만, 적어도 나의 일상에 절반 이상을 지속적으로 차지하는 것들에는 더욱 마음을 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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