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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감독 Aug 09. 2020

나는 내 이름 앞에서 늘 겸손해진다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



얼마 전 김영하 작가가 모 프로그램에서 박완서 선생님이 해준 말이라며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작가로서 사물의 이름을 알고자 하는 노력에 대해 설명을 했고, 나는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작가는 왜 사물의 이름을 알아야 할까, 머리로는 얼핏 이해가 되는 듯했지만 진정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달리 작가가 아닌 거다. 사물의 이름을 기꺼이 알려고 하는 노력, 같은 사물도 다르게 보고자 하는 마음이 모여서 인간애를 담은 창작물을 완성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작가인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사물의 이름을 알고자 노력은 하는가? 혹 나의 이름이라도 진정한 애정을 갖고 먼저 이해해보고자 노력은 했었는지, 이번 기회에 한참을 '이름'에 대해 들여다보았다.







나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것


나는 내 이름을 앞세워야 하는 일들을 지속해왔다. 독립영화를 만들 땐 한송아 감독으로 살게 되었고, 사회부 기자를 할 때에는 내 이름이 박힌 취재증을 들고 온갖 곳을 취재를 돌며 기사를 작성했었다. 또 최근 좋은 기회로 책을 발간하게 되면서 작가 소개에도 나의 소개 및 이름을 꾹꾹 담아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회사에서도 한송아 에디터로서 나의 발행물을 지속적으로 매체에 공개하며 내 이름을 등장시키는 일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나는 내 이름을 등장시켜야 하는 일 앞에 알게 모르게 부끄러움, 그리고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며 지내왔다. 나의 일이 곧 나를 대면하는 것 같았고, 단어 하나 의견 한 줄이 내 이름을 책임져야 할 것 같았다. 항상 나는 내 이름 앞에 태연할 수 없어서 좀 더 나은 내가 되고자,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노력해왔고 부끄러움에 휩싸이지 않도록, 일련의 틈이 없게끔 나를 자주 정돈했다.


하지만 그런 나도 부끄러운 실수들을 하고 살아간다. 나의 이기적임에 마음이 비릿해지는 순간도 있고, 저급한 농담에 일조하게 되는 시간도 있으며, 주변에서 다른 이를 험담하는 상황에서 외면하지 못하고 걸려들어 함께 입을 모을 때도 있다. 누구나 그렇듯 한참을 열심히 살다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열심히 쌓아온 나만의 루틴을 스스로 파괴하고,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은 일상을 지속할 때.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이름을 나긋하게 속으로 불러본다. 그러다 보면 나는 빠르게 스스로의 문제점을 자각하여 해결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도와줬다. 나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타인이 내 이름을 불러주어 내가 나로 살게끔 자각시켜주는 순간도 있지만, 더 강력한 것은 내가 나를 불러 세워 진정한 나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름이 나의 품위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늘 부끄러운,,,,






이름의 뜻은 '내가' 만들어 갈  것



내가 초등학교 일 학년 무렵. 엄마에게 내 이름의 뜻에 대해 물어본 날이었다.


"엄마. 내 이름은 누가 지은 거야?"


"스님이 지어주셨어. 한글 이름으로. 예쁘지? 처음엔 한 씨니까 송이가 어떠냐고. 한송이. 그런데 엄마가 반대했어. 송이는 너무 흔하잖아"


"그건 그런데... 그럼 이름 뜻이 뭔데? 다른 친구들은 다 한자로 뜻이 있던데, 오늘 선생님이 물어보는 데 말을 못 했어"


"글쎄. 특별히 어떤 뜻이 명확하게 있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린 나이였지만 굉장히 헉. 스러웠다. 어떻게 자식의 이름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그리고 한글 이름이라도 그 흔한 뜻풀이를 하지 않았는지. 당황스럽고 섭섭했다. 뚱하게 기분이 상해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엄마는 '꼭 뜻이 있어야 할까? 네가 직접 살아가면서 뜻을 만들어 가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나를 달래려 황급히 말을 지어낸 것 같았는데, 그 말이 서른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나도 실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름의 뜻을 내가 살면서 직접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한송아로 살 수 있게 물꼬를 터준 스님과 부모님께 감사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나의 이름을 주변에서 들었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글자들 사이에서 나의 이름을 발견했을까. 이제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 톤과 억양 그리고 속도로도 나를 왜 부르는 것인지 가늠이 되어 간다. 같은 '송아야' 여도 어느 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또 어느 것은 슬프게, 즐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내 이름이 불러질 때 되도록이면 다정히 그리고 기회의 시간으로 불러지길 바란다.


참 신기한 일이다. 자신의 이름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것. 나의 이름. 앞으로 나는 지금처럼 과오를 범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고 싶다. 더불어 내 이름 앞의 결과물들을 차츰차츰 공고히 해 나가며, 일련의 틈을 인정하고 살고 싶다. 거기에 더 큰 욕심을 보태보자면, 나의 크고 작은 작품들로 인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그래서 그들의 인생에도 특별한 장면을 남겨줄 수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한 행복일 것 같고, 가장 나다운 삶일 것 같다.


나를 늘 나답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내 이름.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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