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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읽는 여자 Sep 06. 2023

너는 인생이 재밌냐?

"재밌게 살아라."

내 연애사의 아주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A는 나에게 늘 물었다.


너는 인생이 재밌냐?


A는 나보다 7살이 많았을 뿐인데, 어르신 같았다. 20대에 신입사원이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른 단어는 '부장급'이었다. 외모로도 부장급 못지않았지만, 말투며 정신세계는 찐 부장급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저런 부장급 놈이랑은 상종을 말아야지.'


인생은, 연애는 절대 결심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보니, 나는 부장급 놈 A랑 사귀고 있었다. 상종을 하덜덜 말자는 나는 A의 행동과 말에 픽픽 웃고 있었다. 나는 A의 모든 것이 재밌었다. 심지어 부장급 외모도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꼭 밝혀야 할 사항이 있는데, 나의 인생 디폴트 값이 '재미'라는 데 있다. 그가 재밌어서 재밌는 게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부장급 같던 A의 꼰대스러움마저도 '재미'로 받아쳐 벌인 데 있었다. 더불어, 연애의 시간도 쌓여 가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20대에 처음 A와 사귈 때도 A는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했다. 나보다 7살 많은 뿐인데도 말이다. 내가 30대가 되자, A는 정년을 걱정하며 지금 결혼해도 애 낳으면 애가 몇 살이냐면서 신세 한탄을 했다. 내 기분의 디폴트 값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A는 자주 묻기 시작했다.


"너는 인생이 재밌냐?"


나는 인생이 재밌었다.


첫 사회생활이었던 방송국 구성 작가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일은 어때?" 혹은 "일은 할 만 해?"였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재밌어요."였다.

진심으로 재밌었다. '큐시트'가 뭔지도 모르고, 방송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나는 뭐가 그렇게 재밌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내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의 기본값 때문이다.


내 인생의 디폴트 값인 '재미', 그것을 내게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은 외삼촌이었다. 나의 외삼촌은 내가 태어나 보니, 호주에 이민 가셔서 살고 계셨다. 삼촌은 가끔씩 학용품도 주시고, 신발이며, 옷도 보내주셨다. 그 당시엔 우리나라보다 호주의 물건들이 좋았다. 지금이야 우리나라 학용품, 신발, 옷의 퀄리티가 훨씬 좋지만. 삼촌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삼촌은 꼬맹이인 내게 태권도를 배워서 호주에 오라고 했다. 당시 삼촌은 호주에서 투잡으로 태권도장을 운영하셨고, 호주 국가대표를 이끌고 한국에 오기도 하셨다. 나는 타고나지 못한 운동신경으로 태권도에 아무런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삼촌은 운동은 젬병이고, 공부만 잘하는 내게 "재밌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꼬맹이인 나는 그 말을 전연 이해할 수 없었다. 삼촌은 호주에서 오랜만에 한국에 나오실 때마다 내게 물었다. "재밌게 사니?"


대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재밌게 사는 인생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촌 말씀처럼 재밌게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대학 생활은 정말 끝내주게 재밌었다. 재밌게 살기로 작정 같은 걸 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삼촌이 한국에 나오셨을 때, 나는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재밌게 살고 있는 모습 보니 좋다. 계속 재밌게 살아라."


 다정한 나의 삼촌이 나의 재밌는 삶을 칭찬해 줘서 몹시 기뻤다. 더 재밌게 살고 싶어졌다.


그 다정했던 삼촌이 뇌종양 진단을 받고, 입원하셨다. 너무도 걱정했는데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전화를 받고 안심했다. 그렇게 안심한 며칠 후에 삼촌의 부고를 들었다.


서호주 번버리 다운타운에 있던 Funeral direction에 삼촌을 뵈러 갔다. 한국의 장례식장과는 아주 많이 다른 그곳은, 마치 호텔 로비 같았다. 장례식장 직원은 삼촌이 계신 방으로 한국에서 온 가족들을 안내했다. 그 방 한가운데 침대 위에 삼촌이 계셨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삼촌은 평안해 보였다. 삼촌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재밌게 살아라."


나는 삼촌을 향해 속삭였다. '삼촌, 삼촌 말대로 재밌게 살게요. 삼촌도 재밌게 살다 가신 거 맞죠? 내 좋은 삼촌 재밌는 인생 사셨을 거라 믿어요.'


삼촌의 장례식은, 삼촌의 재밌는 인생의 좋은 등장인물들이 모여 삼촌 이야길 했다. 삼촌의 마지막은 정말 완벽하게 재밌는 세리머니였다.


나에게 재미란, 재밌는 인생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재밌는 인생에 A는 균열을 일으켰다. A는 나의 재밌는 세계를 이해할 서사가 머릿속에도, 마음에도 없었다. 나는 결국 A와 '재미'라는 인생의 방향이 달라서 헤어졌다.


나는, 지금 마흔의 줄을 넘었다. 여전히 나는 삼촌의 목소리를 듣는다.


"재밌게 살아라."


너는 인생이 재밌냐는 A에게 대답한다.

"나는 인생이 재밌어요. 우리 삼촌이 그랬어요. 재밌게 살라고요."


© vika_strawberrika,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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