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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21. 2021

4년 동안 매주 산을 갔더니

코로나 때문에 못해서 아쉬운 것 중에 대피소를 가지 못하는 것도 있다. 추석 연휴에 지리산 대피소를 예약해서 며칠에 걸쳐 느긋하게 지리산 종주를 하는 건 큰 즐거움이었는데 말이다. 계절마다 그만의 매력이 있지만 가을 초입에 부는 산뜻한 바람을 맞으며 바삭바삭 마른 볕을 쪼이면서 걷는 건 상상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일이다.


산속 깊은 곳에서 맞이하는 밤과 새벽은 또 어떤가. 완벽한 어둠과 고요에 갇힌 밤을 지나 새벽이 오면 온 세상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처럼 신비롭고 웅장한 기운을 느꼈다.    

 

처음 지리산 종주를 했을 때 연하천 대피소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형제봉 일출을 보기 위해 나선 길. 앞도 뒤도 캄캄한 그런 어둠에 갇혀본 건 처음이었다. 랜턴 빛에 의지한 채 갱도를 걷는 기분으로 한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파리한 기운이 사방을 에워싸더니 주황, 빨강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빛깔의 여명이 시작되었다. 자연이 연출해내는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 기분은 몽환적이었다. 극강의 아름다움은 두려움을 동반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름다움과 공포가 공존하는 감정의 요동 속을 헤치며 뚜벅뚜벅 걷는 기분은 특별했다. 


형제봉에 도착해 일출을 기다렸다.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방금까지 기승을 부린 추위는 한순간에 사라졌고 낮은 곳에서 느끼는 태양은 생명의 기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자애로움으로 충만한 빛을 내뿜었다. 내 안에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렸고 나는 펄떡거리는 몸을 가진 인간이자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형제봉에서 난생처음 일출을 봤다

마흔이 되는 해부터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주, 연휴마다 산을 다녔다. 이 시간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산을 가야 한다는, 돌이켜보면 참으로 간절한 마음이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며칠 전 2017년에 카스에 올린 산행기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산장에서의 밤은 일찍 찾아오고 그 고요함에 이른 잠자리에 들면 모든 생물, 만물이 깨어나는 생명력 넘치는 아침을 선사해준다. 그 아침에 커피물 끓이며 아침 기운 속에 흩어지는 커피 향기를 맡노라면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오는 충만감을 느낀다.  
이것이 소로가 말한 생의 진수인가?
아! 이것을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여행에서 오는 경험이 아닌 내 삶 속으로 스며들게 하고 싶다. 이 여유로움, 관조적인 시선을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에도 유지하고 싶다  마치 소로처럼.....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무슨 친구도 아니고... 아, 이 과도한 결기라니... 하다가 이제는 내가 많이 편해졌구나, 싶었다.

   

2017년 <월든>에 심취했던 시절 카스에 올린 산행기

한 번은 여름휴가에 지리산 세석 대피소를 이틀 예약해서 천왕봉을 두 번을 올랐던 적이 있었다. 첫날 성삼제에서 세석대피소, 다음날은 세석에서 천왕봉을 찍고 세석 대피소를 집 삼아 다시 돌아오는 코스였다. 세석평전, 연하 선경(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절경)을 앙코르 공연처럼 두 번 더 즐길 생각을 하니 온몸이 탄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이틀을 연달아서 천왕봉을 올랐더니 만사가 내려다보이는 게 배짱이 커져서 배낭이 큰 아저씨들하고 노닥거리기도 했다. 나는 “어디서 오세요?”라고 물어오는 분이 있으면 그분의 (배낭) 사이즈를 보고 단답형과 장문형 대답 중 뭘로 할지 결정했다. 사이즈 좀 나온다 싶은 아저씨들의 배낭에는 얼음맥주랑 별의별 안주가 다 있었다. 


그날도 60리터 배낭을 멘 아저씨랑 얘기하던 중이었는데 그분은 연하천 대피소 근처에서 비박을 했는데 잘못 자서 컨디션이 안 좋다, 하루 더 묵을 계획이었지만 그냥 내려가야겠다, 등의 말을 하며 라면, 햄 같은 식량을 나한테 가지라고 했다. 내가 고맙다고 하자 아저씨는 배낭이 가벼워져서 이제야 살았다며 나한테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다.     

 

사람 하나 살리고 식량도 생기자 이대로 내려가기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 로터리 대피소를 인터넷으로 예약했다. 마침 휴가 날짜도 남아있었다. 6킬로미터만 걷고 대피소에서 쉬면 되니까 정말 여유로웠다. 로터리 대피소에 일치감치 도착해서 밥 해 먹고 나무 그늘 아래 있는 작은 평상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짐을 싸서 내려가다 보니 중산리 야영장이 있었다. 수도꼭지를 보는 순간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서 물을 틀고 머리부터 갖다 댔다. 아, 문명의 혜택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순간. 새벽 6시도 안된 시간, 보는 사람도 없고 봐도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구석구석 잘도 씻었다. 한여름에 땀을 비처럼 흘리고도 4일 동안 씻지 못했으니 그때의 개운함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샤워를 마치고 중산리 탐방안내소를 나와서 물기를 털며 아스팔트 길을 걷는데 문득 웃음이 나왔다.      


작년까지 휴가를 남편, 딸과 호텔에서 보냈는데 별거를 한 올해는 딸은 아빠한테 가있고 나는 이렇게 하루 12,000원인 대피소에서 자는 휴가라니, 그런데 여기에도 재미가 있었다. 이런 재미가 있는 줄 몰랐으면 어쩔뻔했을까 싶을 정도로 자유로운 기쁨. 다른 길에는 다른 행복이 있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얼마 전에 한 지인이 동생이 이혼한 후에 피해의식으로 외부와 단절하고 지낸다며, 내 경우는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괜찮아 보여서 한 질문이었겠지만 그런 일반화가 상대를 힘들게 한다는 걸 그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사이가 좋은 부부와 아닌 부부가 있는 것처럼 이혼, 비혼인 사람 중에서도 다양한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언니는 내 마음을 이해 못한다”라고 말하는 동생에게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네가 좀 알려줄래? 이해하도록 노력해볼게.”

그렇게 말하고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라고 했다.      


그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나도 겪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단지 모른다는 걸 인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는 건 알았다.


돈이 없어도, 이혼을 해도 일상의 기쁨과 슬픔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오고 부지런하게 그걸 찾으려고만 한다면 어떤 것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움직이고 땀 흘리고 밥을 먹는 일이 중요하고 그 외에 것들은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으니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자는, 지금 걷는 이 한 발과 오래 걸은 후의 달콤한 휴식과 식사에 집중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했다.     


하나 잃었다고 세상 전부를 잃은 것처럼 굴던 내가 1700미터 고지에서 밤을 보내고 1915미터 천왕봉을 왔다 갔다 했더니 이제야 나한테 비처럼 쏟아지는 것들을 보게 되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반짝이는 호수처럼 진짜 보석은 내 가까이에 있으니 잊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거였다.

청암산에서 발견한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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