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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24. 2021

시어머니가 두 명

2021. 07. 12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찢어지게 힘들기는 처음이었다. 딱 죽겠다 싶을 때 바지를 보니 무릎 부분이 진짜 찢어져 있는 게 아닌가. 옳다구나 하고 사진을 찍으니까 지리산 아빠가 "또 핑곗거리 잡았네"라고 했다.      


고산휴양림 환종주 16킬로미터, 희남이 삼촌이 정글 칼을 챙겨야 한다고 할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았다.

"여기부터는 길이 희미해서 바짝 따라붙어야 혀."     


그러게 길도 없는 데를 왜 가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열심히 쫓아갔다.   

  

"말하느라고 힘 빼지 말고 발을 빨리 놀려."

지리산 아빠까지 잔소리다.

"무슨 시어머니가 두 명이예요?"     


중얼거리면서 가다가 문득 나무 위에 새둥지를 발견했다. 나뭇가지로 나름 정교하고 앙증맞게 만든 집을 보는 순간 금방까지 죽을 것 같던 마음이 일순 평온해졌다. 지금은 빈 둥지이지만 예전에는 여기서 알을 낳고 먹이를 물어다 주며 새끼를 키웠겠지, 를 상상하니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다시 현실, 계속 둥지를 보고 있다가는 뭘 꾸물거리고 있냐는 소리가 날아들 것 같아서 얼른 자리를 떴다. 덥고 습해서 한증막 따로 없었다. 선두에서 희남이 삼촌이 정글 칼로 길을 만들면서 가고 지리산 아빠는 “가시나무 조심해”라며 가지를 부러뜨리며 갔다. 하필 이런 날 어쩌자고 반팔을 입고 온 나는 가시에 팔이 꼼꼼하게 긁혔지만 앞에서 나보다 고생하는 분들도 있는데 힘들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끝은 있었다. 극적으로 임도가 나타났고 금세 주차장이 나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차에 에어컨을 최대치로 켠 다음 맥주를 마셨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아, 행복하다”라고 중얼거렸다. 가만있어봐, 나 금방까지 죽겠다고 해놓고 이건 뭐지? 아, 분명히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행복하고 뭐가 이런 건지. 에어컨 바람에 발가락 꼼지락거리면서 맥주를 마시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한 기분.     


"좀 짧았지? 동막 마을(더 먼 길)로 내려갔어야 했는디 말이여."

희남이 삼촌의 말에 내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예요. 삼촌 진짜 증오할 뻔했다고요!"  

   

오늘 집에 가만히 앉아서 어제 산에 간 걸 생각하니 뭔가 치열했던 그 시간이 그리워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아냐, 지금이 좋아, 지금이 좋다고 하면서 고개를 힘차게 저으면서도 자꾸만 산에서 찍은 사진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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