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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24. 2021

인월 버스

2021. 05. 02

남원 인월-바래봉-고리봉-정령치로 이어지는 산행을 했다. 고리봉에 도착했을 때 정령치 휴게소로 먼저 간 희남이 삼촌한테서 전화가 왔다.     


“4시 10분에 인월로 가는 버스가 있어. 빨리 와봐.”     


전화가 온 시각은 3시 59분, 고리봉에서 정령치까지 0.8킬로미터를 거의 날 듯이 해서 내려갔다. 지리산 아빠는 금방까지 앞에 가던 내가 사라져서 길을 잃어버렸나 하고 찾았는데 알고 보니 혼자 버스를 안 놓치려고 냉큼 내려간 것을 알고 어이없어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무이, 아부지”를 (스무 번쯤) 찾고 제일 굼떴던 내가 순식간에 물찬제비로 바뀔 줄은 몰랐다면서.     


희남이 삼촌이 버스 기사님한테 기다려달라고 하고, 버스에 타고 있던 인월면 주민들은 “바쁜 일도 없는디 천천히 가면 되지 뭘”이라고 한 덕분에 우리 셋은 무사히 버스 탑승에 성공할 수 있었다. 희남이 삼촌은 택시비 25,000원이 굳었다며 무척이나 기뻐했고, 나는 버스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1등 주자의 승리감에 취해있었다. 버스비는 인당 천 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면단위 마을의 농가주택과 상점을 바라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적한 시골 국도, 그걸 바라보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행복감은 한가로울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차를 세워둔 구인월 마을회관까지는 1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었지만, 이런 평평한 길이야 일도 아니지 하면서 걸어가기로 했다. 늦은 오후의 해는 포근했고 모내기가 막 끝난 논을 구경하며 무엇 하나 바쁠 것 없는 걸음으로 흐느적거리며 걸었다.      


한가롭다는 건 할 일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이기보다 어떤 일을 막 끝내고 났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벅찬 일을 하고 난 뒤에 느끼는 성취감과 후련함 같은.     


차에 타서 가는 길에 맥주와 콜라를 샀다. 맥주는 희남이 삼촌과 내 거, 콜라는 운전을 하는 지리산 아빠 몫이었다. 지리산 아빠한테 콜라를 주고 나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캔 맥주를 탁 따서 꿀떡꿀떡 마시면서 “아 행복하다”라고 했다. 이에 질세라 지리산 아빠도 “역시 콜라가 최고야. 나는 콜라가 좋아”라고 했고, 나는 “그럼 다음에 운전 안 할 때도 콜라만 드시는 걸로 알고 있을 게요”라고 했더니 지리산 아빠는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나는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뭐라고 추임새를 넣고 싶은데 괜히 눈치가 보여서 “캬, 맛없다”, “어? 조금만 맛있네?”라고 했고 지리산 아빠는 그렇게 깐족거리는 게 더 짜증 나니까 그냥 마시라고 했다.     

 

맥주 한 모금에 오징어 땅콩 두 개씩 입에 넣고 BTS노래를 듣는데 행복했다. 느긋하고 나른한 그 기분은 행복이라고 부르면 딱 맞을 감정이었다.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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