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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01. 2021
웨하스와 맥주
산을 내려오자마자 우리는 곧장 마트로 향했다. 지리산 아빠가 아침에 팔토시를 샀던 마트는 냉장고가 고장인지 맥주가 미지근했고, “이래서는 못 마신다”는 말을 네 명이 합창을 하고 우르르 빠져나와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몰려갔다.
배낭을 멘 산악인 네 명은 냉장고 앞에서 신중하게 맥주를 골랐다. 가지런하게 줄을 서있는 맥주가 아름답게 보이기는 처음이었고 어쩐지 숙연한 기분까지 들었다. 나는 에델바이스, 유선수와 삼촌은 카스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걸 보고 나는 같은 가격에 네 캔을 살 수 있다며 카스를 스텔라와 버드와이저로 바꿔왔다. 내가 맥주를 들고 갔을 때 뺏기는 줄 알고 놀랐던 두 사람은 두 캔이 세 캔이 된 걸 보고 겨우 안심하는 얼굴로 돌아왔다.
오늘 코스는 덕유산 칠봉-설천봉-향적봉-중봉으로 19.6km였다. 중봉에서 오수자굴까지 1.4킬로 미터라는데 굴에 갇힌 게 아닌지 의심될 싶을 정로로 지루했다. 누군가가 하산주 얘기를 꺼낸 건 그때였다. 아직 도착하려면 7, 8킬로미터가 남았지만 다른 얘기를 하다가도 어느새 그 얘기로 돌아와 있었다.
“안주는 뭐로 하지?”
“웨하스요.”
웨하스가 맥주 안주로 좋다며 희남이 삼촌이 사 왔을 때, 나는 이게 무슨 추억의 과자냐며, 과자가 업데이트가 안 됐나 봐요,라고 했다. 하지만 먹어보니 웨하스가 맥주랑 찰떡궁합이 아닌가. 그 뒤부터 나한테 웨하스는 어린 시절 선물세트에서 자리만 차지했던 과자에서 신박한 맥주 안주로 업데이트되었다.
“맨날 웨하스만 먹냐? 오늘은 땅콩 오징어 어때?”
유선수의 말에 내가 “오징어 땅콩”이라고 정정해주자 유선수는 알아들으면 된 거라고 했고, 나는 오징어 땅콩 말고 짱구로 하자고 했다. 우리는 오수자굴에서 잠시 쉬었는데 난데없이 난상 토론이 펼쳐졌다.
“캔 맥주는 얼리면 안 터져?”
지리산 아빠의 질문에 유선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카스는 안 터지고 하이트는 터져요.”
희남이 삼촌이 버럭 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맥주 캔을 개발한 사람에게 로열티를 지급하고 맥주회사가 공통으로 쓰는 건디.”
“실험해보면 카스는 진짜 안 터진다니까요.”
유선수가 우기기 시작했다. 나는 이 흥미진진하지 않고 의미도 없는 실랑이를 보면서 영화 <친구>에서 조오련과 바다거북이하고 수영을 하면 누가 이길 것 같냐고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오수자굴을 지나서도 길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중봉에서 오수자굴, 오수자굴에서 백련사, 백련사에서 무주구천동, 세 개의 길이 누가 누가 더 따분한지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것 같았다. 그때쯤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백련사만 지나면 나오는 어묵 파는 식당, 거기만 가면 목을 축일 수 있어, 조금만 힘을 내면 돼. 사막에서 아련하게 보이는 오아시스를 향해가는 기분으로 걸음을 빨리하던 그때,
“그 집에서 살 생각 말어. 지난번에 막걸리 한 병이 오천 원이었잖여.”
삼촌이 내 속을 귀신같이 알고 말했다. 순간 다리 힘이 탁 풀렸지만 무주구천동까지 가는 것밖에는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편의점이라는 오아시스에 다다랐다.
편의점 냉장고 성능은 좋았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순간,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한 치의 의심 없는 기분 좋은 만족감이 온몸에 퍼졌다. 9시간 동안 메고 있었던 배낭을 내려놓는 것만으로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고,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는 심정이 되었다.
<행복의 기원>의 저자 서은국 교수는 “행복은 관념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했다. 우리의 뇌에서 좋다는 전구가 자주 켜질 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끼고, 전구는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켜진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