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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Feb 06. 2024

고객을 사랑하는 마트에는 없는 것

요즘 마트에 가면 가격 때문에 마음이 쪼그라든다. 만만했던 채소조차 눈을 의심할 정도로 비싸서 마치 디스토피아 영화가 현실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귤 한 개 더 먹으려고 싸우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떠오르면서, 언젠가 신선한 식재료는 비싸서 먹지 못하는 날이 오는 게 아닌가 걱정하며 장을 보면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지난여름 햇볕이 뜨겁다 못해 따갑게 내리쬐던 날, 툰자님과 대야오일장을 찾았다. 당장 모자부터 하나 사서 써야 할 것 같았다. 대야오일장은 천장시설이 없어서 햇빛을 피할 데가 없다. 급한 대로 차에 있는 우산을 썼다.      


“거봉이 반값이네. 여기 왔으면 두 박스 사서 우리도 먹었을 텐데.”     


툰자님은 시댁에 가면서 장을 봤는데, 마트에는 거봉이 3kg에 4만 원이나 해서 시댁에 가져갈 것 한 박스만 샀다고 했다. 그랬는데 역시 시장이 싸다며 좋아했다.     


마트에는 멜론이 한 통에 만 원이 넘었는데, 시장에서는 크기에 따라 이천 원, 삼천 원, 오천 원이었다. 나는 상인이 잘라주는 멜론 한 줄을 맛보고, 삼천 원짜리 두 개를 샀다. 그해 첫 멜론이었다. 과일돼지 초밥이는 멜론도 당연히 좋아하는데 작년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못 사줬다.     


거봉, 샤인 머스캣, 머루 포도 작은 박스가 모두 만 오천 원으로 마트에 비해 반값이었다. 가격이 싼 이유는 마트에 납품하기에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먹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나는 상품성이 떨어져서 더 좋다.     


얼마 전에 샤인머스캣을 선물로 받았는데 알맹이가 얼마나 큰지 작은 계란만 했다. 그걸 먹는데 왠지 모르게 내가 이걸 먹을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세 뱃속으로 사라지는 포도가 아깝기도 했고, 나한테 오기까지 많은 설비와 기술, 자본이 들어가고 선별과정을 거쳤을 걸 생각하니 과일이 아니라 ‘상품’을 먹는 기분이 들어서다.


마트에는 과일, 오이, 청경채 같은 농산물도 포장을 해서 매대에 누워있다. 900원짜리 팽이버섯조차 스티로폼 박스에다 랩이 씌워져 있는 형편이니 다른 건 말할 것도 없다. 선택의 여지없이 그런 것들을 사 와서 정리하면 쓰레기가 한가득이다.      


툰자: 고구마가 벌써 나왔네. 근데 저걸 언제 다 먹어.

나: 한 박스를 반으로 나눌까요?


우리는 한 박스에 만 원인 밤고구마를 반으로 나누었다. 오일장은 누구랑 같이 가야 제맛이다. “싸네, 싸”하면 “맞아, 맞아” 맞장구 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00를 사서 저녁에 만들어볼까? 한 번도 안 해봤는데”하면 옆에서 조리법을 설명해 주면서 장을 보면 흥이 오른다.     


두부와 채소를 파는 할머니에게 두부 두 모를 달라고 했다. 두부 두 모에 사천 원이니까 당근 하나를 천 원에 달라고 해서 오천 원을 내면 되겠다고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할머니한테 물었다.   

  

“당근 하나에 얼마예요?”

“그냥 가져가!”    

 

호탕하게 말하는 할머니다. 그래도 받으세요, 하고 오천 원을 드렸다.  

  

다음은 김치. 파김치가 맛있게 보여서 달라고 했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얼마어치 살 거냐고 묻지도 않고 거침없는 손길로 봉지에 김치를 담았다.  

    

“김치 얼마부터 파세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원!”


시장에서는 12,990원 이런 거 없다. 만원, 딱 떨어지는 값이다. 소심하게 물었는데 마음이 탁 놓였다.     


“배추김치도 사. 날도 더운데 많이 주께. 오후에는 비가 온다고 하니까 다 팔아버리고 들어가게.”     


아주머니는 떨이라면서 배추김치를 이만 원어치 되는 양을 담고 만원만 달라고 했다.    

 

시장에서는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공평하게 덥다. 땀을 흘리고 손부채질을 해가며 물건과 돈을 주고받다 보면 몸은 부산스러운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해진다. 나보다 연세가 많은 상인이 하는 반말이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고 정겹게 느껴진다. 시장의 활기 속에 있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목소리가 커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뭘 만들어볼까 하는 의욕이 퐁퐁 샘솟는다. 손님에게 “그냥 가져가!”하고 큰소리칠 수 있는 당당함, 덤, 수고에 대한 고마움, 웃음은 고객을 사랑하는 마트에는 없는 것들이다.    


장터식당에서 먹은 잔치국수, 짜장면
우와, 메론이다! -초밥
얼마어치 살 거냐고 묻지도 않고 김치를 담는 거침없는 손길


*설을 앞두고 있지만, 오른 물가 때문에 움츠려드는 요즘입니다. 지난여름에 오일장을 갔던 일을 떠올리며 글을 썼는데요, 가격표 말고 우리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이 많다는 걸 다시금 확인했어요. 독자님들께서도 마트에는 없는 것들을 찾아보는 명절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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