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이름만 들어봤어요.
이번 주부터 '에세 1'권을 브런치북 3주에 걸쳐 기록을 남겨보려고 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일주일에 '에세 1'권을 독파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또르륵.......ㅠㅠ)
우연히 집에 ‘사라 베이크웰’이라는 작가가 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은 내가 산 게 아니라 남편에게 물어보니 결혼할 때 정리하면서 얼떨결에 챙겨 온 듯하다.
(참고로 남편은 책을 읽지 않는다. 남편을 씹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다.)
오! 이런 인문학 도서가 우리 집에 있었다니?
숨은 보물을 발견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표지를 보니 프랑스 정신의 아버지 몽테뉴의 인생에 관한 20가지 대답에 관한 책이겠구먼!
'2011년 전미비평가협회상, 영국 더프 쿠퍼상, 아마존닷컴 올해의 책'이라고 하는 걸 보니 이 책은 베스트셀러임이 분명하다.
가만, 그럼 이 책은 몽테뉴에 대해 사라 베이크웰 작가가 쓴 거네?
지담 작가님의 책 고를 때 팁은 철학가들이 쓴 원작을 분석하고 해석한 책보다는 원작 그대로 보는 걸 추천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유행하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를 고르라고도 하셨지.
몽테뉴에 대해 얼핏 들어는 봤지만 정확히 어느 시대에 살았고 어떤 인물인지는 와닿지 않았다. (처음엔 에게? 인가 제목도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제목이'수상록'으로 나왔다.)
미셀 드 몽테뉴는 1533년 2월 28일, 보르도 시장인 아버지 피에르 몽테뉴와 유대인 혈통의 어머니 앙투아네트 드 루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부터 13살까지는 보르도의 학교에 들어가 스콜라학자들에게 엄격한 주입식 수업을 받았다. 몽테뉴는 그런 주입식 수업들을 싫어했으나 문학과 연극만은 좋아했다. 이후 2년간의 공백기를 가지다가 15살 무렵 대학교를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몽테뉴는 성에 은거하면서 『에세』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철학적 체계를 세우려는 작업이 아니라 '나 자신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자신을 탐색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탐색했다. 그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자신의 물음을 결코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명령문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는 경직된 주장을 하는 대신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는 수많은 시도들을 즐겼다. (나무위키 제공)
나 자신을 연구하는 철학가라니.
일반적으로 철학가나 사상가들은 이래이래 해라! 뭔가 강한 명령조로 혼내는 게 익숙한데.
몽테뉴는 순딩이 버전 철학가인가?
그 길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표지도 영 재미없어 보이는 ‘에세 1’을 빌려왔다.
번역가의 소개말이 12장이나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에 눈은 따라 읽어가나 머릿속에 다 들어오지는 않는다. 두 명의 옮긴이가 원본을 완전히 번역하는데 대략 15년 정도 걸렸다는 걸 보면 ‘에세’가 보통 책은 아닌 듯하다.
몽테뉴가 독자에게 하는 첫 멘트가 인상적이다.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진솔하게 쓴 것이다. (중략)
그러니 독자여, 나 자신이 내 책의 재료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경박하고 헛된 주제에 그대의 한가한 시간을 쓰는 것은 당치 않다.
‘평생 곁에 두고 봐야 한다는 책’이라고 평가되는걸 몽테뉴가 저 세상에서 안다면 의아해할래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무엇보다 남이 아니라 자신을 탐구하는 에세이를 남긴 몽테뉴의 진가는 사후 400년 가까이 지나도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내가 만약에 책 한 권을 썼는데 400년이 지나도 읽힌다면..
아, 상상만으로도 광대가 승천한다.
몽테뉴가 죽음에 대해 아래와 같이 남겼다.
이와 관련된 크로이소스 왕(주1) 의 이야기는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다. 키루스 대왕에게 생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은 그는 사형 집행 직전에 “오, 솔론이여, 솔론이여!”하고 외쳤다. 이 일을 보고받은 키루스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묻자 크로이소스가 대답하기를, 예전에 솔론이 자기에게 해 준 경고가 있는데 인간사는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해 사소한 일 하나로도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게 되는 법이니 아무리 억세게 운이 좋아 보이는 사람일지언정 그 사람 생애의 마지막 날에 이르기 전에는 함부로 행복한 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중략)
우리 삶의 한결같은 행복은 좋은 천성을 가진 마음이 누리는 고요와 만족, 그리고 잘 조절된 영혼의 단호함과 침착함에 달려 있는데, 삶이라는 연극의 마지막 장,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어려울 그 이후의 부분을 어떻게 공연하는지 보기 전에는 이 행복이 그 사람 것이라고 단언하지 말 것을 그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다른 경우에는 언제나 가면을 쓸 수 있다. 철학에서 내놓은 멋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사실 겉치레일 뿐이다. 시련이 있어도 우리를 폐부 깊숙이까지 시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태연자약한 얼굴로 가장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과 우리 자신이 맡게 되는 이 마지막 배역에서는 더 이상 그런 ‘척’할 수가 없으며, 평이한 제 나라 말로 또렷이 말해야 하고, 단지의 맨 밑바닥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솔직하고 단순하게 내보여야 하는 것이다.(중략)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할 때 나는 항상 그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고려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주요한 관심 중 하나는 그 마지막이 잘 이루어지는 것, 즉 고요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죽음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마지막 종착역이다.
그 종착역에 도달하고 나서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도 이뤄진다.
새삼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잘 죽으려면 내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나에 대한 평가의 관건이겠지.
고요하고 담담하게 맞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결국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몽테뉴의 고뇌가 400년이 넘어 내게로도 스며든다.
이타적인 삶을 위해 나를 좀 더 키우기로 결심한 지 46일 차다.
아직까지 빠지지 않고 매일 글을 올리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부족하고, 여전히 철학책은 친해지기 어려운 친구이다.
그래도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담금질하는 내가 멋지다고 칭찬해 주련다.
결국 지금 생각 대신 행동으로 실행하는 내가 쌓이고 쌓여 후세 내 죽음도 평가되겠지.
p.s‘에세’를 독파하고 나면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도 읽어야겠다.
결국 모든 결론이 ‘어떻게 살 것인가’로 통하는 것인가. 그래서 제목을 저렇게 지은건지도..
주 1> 크로이소스왕: B.C. 595~547? 리디아의 마지막 왕.
*독자님들의 따뜻한 댓글은 저에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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