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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끝판왕 집단

남편아, 너만 보고 시집왔다.

by 환오

20대 중반, 인생의 큰 위기가 왔을 무렵 내 손을 잡아주신 건 주님이었다.

으잉? 웬 뜬금포 신앙 고백이냐고?

1화에서도 말했지만 내 결혼 조건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거였다.

https://brunch.co.kr/@yjchoichoi/33

시댁은 제사가 많은 종갓집 장손의 집안이었고 교회 다니는 며느리는 탐탁지 않았을 터.


하지만 사랑의 힘은 그야말로 살벌하게 무서웠다.

죽도록 힘들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운 신을 버리고 결국 남편에게 도망가버렸다.


그리고 대망의 첫 명절이 다가왔다.

남편은 당시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모두 살아계셔서(지금은 할머니만 계신다) 시골집에 내려가야 했다.

우리는 항상 시골에 갈 때마다 꼭두새벽같이 일어나 내려갔다.

그러면 몇 시간 뒤에 남편의 형 부부가 내려왔다. 문제 많은 외제차를 타고.

https://brunch.co.kr/@yjchoichoi/78

언젠가 그들은 시골집 마당에서 소중한 외제차를 열심히 세차하고 있었다.

비누 거품을 서로에게 튕기며 영화 한 편을 찍고 있었더랬지.


그들이 세차하는 동안 나는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의 설거지를 한 보따리 해치우는 중이었다.

시어머니는 민망하셨던지 '큰애는 왜 안 들어온다니' 이 말만 하시지 들어와서 너도 하라는 말씀은 없으셨다.


그렇다. 그녀는 시댁에서 일할 때 얌생이처럼 빠져나가는 기술이 대단했다.(나도 한수 가르쳐주지...)

남편의 등 뒤에 숨어서 언제나 주방에는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앉아서 제기 닦는 일을 주로 했었지.

난이도 최하위.


내 기억이 맞다면 그들은 제사 때나 명절에 단 한 번이라도 일찍 온 적이 없었다.

시골이야 각자 교통사정이 다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일 년에 두 번 명절 말고 서울에서 지내는 나머지 제사들은 평일 저녁일 때가 많았다.


한 번은 일요일 낮제사였는데도 음식 준비가 다 끝날때까지 깜깜무소식. 심지어 점심까지 느긋이 먹고 들어오는 모습에 기가 찼지만, 시어머니는 무슨 사고 난 줄 알았다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 이상은 아무말도 안하셨다..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시댁 식구 온 집안사람들 모두 이 집 장손에게는 아무도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뒤에서는 욕하면서 앞에서는 바른 소리 한 마디도 못하는 못난 어른들..

하긴 이 집에서 제일 큰어른인 시아버지도 가만 있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왜 이렇게 늦게 왔니? 어른들 다 준비하고 환오도 오전부터 준비했는데

그때 적어도 이 한마디 해주셨다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텐데. (아니다. 감사하다. 내게 글감을 주셨다!)


왜 틀린 것도 맞다고 하시는 걸까?

난 적어도 틀린 게 맞다고 하는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다.

오빠가 틀리면 혼이 났고 나도 틀리면 똑같이 혼이 났다.

우리 부모님은 누구 하나만 편들어주는 부모님은 아니셨다.


공자는 논어 헌문(憲問)편에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愛之 能勿勞乎 (애지능물로호)

忠焉 能勿誨乎 (충언능물회호)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자식일수록 힘든 일은 혼자 헤쳐나가도록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아이가 징징댈때마다 다 받아주고 해결해주는 것은 결국 아무능력도 키우지 못하게 해서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길임을 왜 모르는가....




나는 평일 제사에도 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 곰탱이라 칼퇴하고 바로 시댁으로 향했었다.

그러면 7시 언저리에 도착했는데, 그쯤 되면 고모 4시스터즈 중에 두 분 정도는 도착해 계신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손을 씻고 내 할 일을 찾아낸다. 나물이나 전은 이미 시어머니가 끝내 놓으신 상태라 내 담당은 대개 큰 조기를 굽는 일이었다. 딱히 일이 없어 보일 때는 가만히 있기도 민망해서 항상 시어머니께 도와드릴 일 없냐 여쭤보았다.


8시가 되면 나머지 시고모들 포함 시댁 식구들 대부분이 도착한다.

근데 주인공은 언제나 늦게 오는 법이지.


형 내외가 오질 않는다.


나는 남편이 야근을 하더라도 무조건 끝나면 쏜살같이 시댁으로 달려갔었는데.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같이 따라가는 선택은 생각도 못했었다.(으이구, 바보)

남편이 없는 시댁이 어색했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형의 와이프는 당시 네O버 과장이었기에 야근이 많았다고 했다.

밤 12시까지 일하는 날이 부지기수라고 했다.(이 모든 건 남편의 형을 통해서 건너건너 들음)


아참, 에피소드가 줄줄이 사탕처럼 많은데 중간에 껴넣어도 될까?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내 입 좀 털어야겠다. 하긴 계속 털지 않았뉘;;)


신혼 때 시댁과 10분 거리에 살았기에 평일에도 저녁을 같이 먹자는 호출을 자주 받았었다.

그럴 때면 한 번도 안 돼요 소리도 못하고 역시나 칼퇴를 하고(그놈의 칼퇴) 시댁으로 건너갔다.


한 번은 남편이 늦는 바람에 나랑 어색하게 남편의 형(그날따라 형도 와있어음)과 시어머니 셋이서 밥을 먹은 적도 있었다.(이 조합도 참 쉽게 보는 조합은 아니죵?)

밥이 돌 같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먹는다. 어색하지만 전혀 안 어색한 척!


남편의 형을 좋아하진 않아도 싫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역시나 그날도 와이프의 돈 자랑은 시작됐다.

남편이 오자 뜬금없이 “야 OO이 이번에 상여가 700 나왔다, 대박이지!”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기 와이프 상여금을 금액도 까면서 자랑질을 해댔다.


아휴.. 아주버님 그러니까 자랑할 땐 자랑값을 내셔야 한다니까요...

내 마음 속에 공허한 메아리만 친다.

와이프 직장이 자기가 다니는 직장인 마냥 자랑스러워했다. 그래,그럴 수 있다.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돈 자랑은 위험하다.

남편하고 둘이 있을때 따로 하던가, 나는 무슨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듯한 존재로 대해졌다.

셋이 있어도 나는 그 이야기의 들러리 일뿐이다.


나라면 저런 말 쉽게 못할 텐데 어떻게 저렇게 입이 방정이지?

어쩜 저렇게 형제가 다르지?

남편이 입에 본드 붙인 이유를 알겠어.

남편 빼고 이 집안 식구들은 다 말이 많다.

그래서 당신은 입을 닫고 귀를 열 수밖에 없었겠구나.

결혼하고 나니 남편이 말수가 적은 이유를 알겠다.


또 언젠가는 시댁 식구들 다 모여 외식을 하는데 그녀가 30분 넘게 통화하느라 자리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와이프가 들어오자마자 대신 설명해 준다.

“무도 김태희 작가 알지? 그 작가랑 통화하느라~~”

우리 와이프 무도 작가랑 일로 통화하는 여자다~~ 부럽지~~ 메롱메롱~~


네O버 안 다녔음 어쨌을 뻔했을까.

형은 자기와는 다르게 스펙 있는 여자랑 결혼하는 게 꿈이었을까.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그는 만날 때마다 입으로만 터는 뻥카가 대단했다.

있는 척, 있는 척, 또 있는 척......


우리 집값 5억 올랐대~ 대박이지? 메롱메롱~~

몇 년 뒤에는 집 잘 샀다고 집 자랑. 만나면 집 주변에 인프라 자랑.

당시만 해도 집 안 사고 전세 살았던 동생네 입장은 왜 생각을 못할까.

아, 귀에서 피날 지경... 점점 정나미가 떨어진다.




아까 마저 평일 제사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형내외는 대개 9시가 넘어서야 다정히 같이 들어왔다.

절대 따로 오는 법은 없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내가 2시간 동안 멀뚱히 그들을 기다리면 늦게 와도 고생했다 일하느라 힘들지 우쭈쭈 우리 큰며느리.


이 집안의 보이지 않는 차별이 느껴졌다.

뭐랄까. 대놓고 부당하지는 않았지만 찜찜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이 정도면 대놓고 부당한건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문 앞에서 기다리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른들이 많아서 다 인사드리느라 나를 못 봤나 싶어 그들이 올라오는 소식이 들리면 나는 제일 먼저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현관 앞에서 기다렸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남편에게는 인사를 할지언정 나는 쌩~ 노룩패스였다.

노룩패스 원조

시간이 지날수록 비참했다.

시댁 어른들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입구에서 구두를 벗으면서 한숨을 쉰다. 또 이렇게 많은 시댁 식구들이 모여서 그녀도 싫었겠지. 하지만 나 역시 며느리였는데.

당신이 안오는 동안 내가 며느리 역할 다 하고 있었는데..


왜 우리는 한 팀이 될 수 없었을까.

그녀가 시댁을 싫어하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나까지 도려내는 건 왜일까?

나이를 떠나서 그래도 꼬박꼬박 형님 이라 부르며 대접해드리려 했다.

그게 이 집안 규칙이었으니까.


사실 그녀와 나는 어설프게 나이가 꼬였다.

나는 빠른 82년생으로 띠(주1)는 81년 닭띠.

남편의 형과 동갑인 그녀는 82년생 개띠로 학교 입학순으로 보면 내가 그들보다 한 살 위였고, 나이로 보면 동갑이었다.


이런 사실이 시댁에서는 불편했는지 언젠가 시어머니는 모인 식구들 앞에서 나보고 너는 이 집에서는 개띠라고 하셨다.(당신도 민망한지 살짝 웃으셨었지)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한마디도 꺼낼 순 없었다.


어머니 저 진짜 닭띠예요. 제가 양력은 82년생이지만 음력 생일이 81년 12월 생이랍니다. 제 음력생일 아시잖아요. 그리고 띠는 입춘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저는 닭띠가 맞아요. 결혼 전에 궁합 본다고 제 생시까지 다 알아가셨으면서,왜 제가 태어난 날도 부인하세요.

그때는 어이없어서 말씀 못 드렸는데요,

큰며느리가 불편할까 봐 그렇게 대놓고 가족들 앞에서 며느리 띠까지 바꾸는 집안은 세상에 유일무이할 거예요. 할튼 신박한 집안이세요.

하긴 어머니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어머니도 결국 남의 집 딸인걸요.




결혼한 다음 해 봄이었나.

남편 형수인 그녀의 생일이 돌아왔다.

시어머니는 큰며느리 생일상을 당신 집에서 차려주고 싶다고 하셨다.

(자, 이쯤에서 예상되시죠잉?)


나는 나랑 인사도 안하고 말도 안 섞는 그녀를 위해 생일상을 도우러 시댁에 호출을 받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마침 남편은 회사 동기의 결혼식 참석으로 오전부터 정장을 빼입고 나를 버리고 나간 뒤였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나 이렇게 셋은 한 집에 있다.

나는 그녀의 생일상을 차려주기 위해 바닥에 앉아 제사 때처럼 전을 부치고 있다.


다 계획이 있으셨다.

이래서 시댁 근처로 집 구해주셨구나.

아, 나만 몰랐어. 나만......(물론 저의 첫 생일상도 시댁에서 받았지만 시어머니는 큰며느리 안 부르셨답니다.)

sticker sticker



(주1) 한국에서 띠 계산은 그 해 입춘을 기준으로 한다고 합니다. 대게 2월 4일~5일 정도라고 하네요!



*독자님들의 따뜻한 댓글은 저에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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