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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태제 Oct 30. 2022

월성 할머니

황분희 할머니는 왜 탈핵 투사가 되었나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황분희 할머니의 마당은 온갖 과일나무들과 옥수수의 숲, 산딸기 넝쿨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이다. 

집 앞 마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100년이 다 된 뽕나무가 휘영청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할머니 내외분이 이 집을 구입했던 1986년에 이미 고목이었던 뽕나무는 지금도 여름이면 가지마다 한 가득 짙은 남보라빛 오디 열매를 품어 내놓는다. 오디 열매가 가득 맺혔을 때는 그 무게로 나뭇가지가 땅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지는데, 오디 열매가 다 떨어지고 나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나뭇가지가 위로 올라가 똑바로 선다. 때를 맞춰 할머니 댁을 찾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할머니는 이 모습을 보며 나무의 신령스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집 뒷마당에 할머니가 직접 심고 가꾸어오신 나무들은 철마다 색색이 예쁜 과일을 내놓는다. 살구, 복숭아, 자두, 사과, 미니사과, 배, 단감... 텃밭의 키 작은 초목들은 산딸기와 복분자를 맺고, 열을 지어 가지런히 정돈된 밭고랑에서는 봄에는 감자, 여름에는 가지와 고추와 방울토마토와 옥수수가, 가을에는 고구마와 배추가 결실을 맺는다. 


할머니는 이 집과 텃밭과 정원에서 30년 넘는 세월동안 농사를 지으며 세 딸과 손주 둘을 키웠다. 한참 딸들이 자랄 때에는 학비를 마련하느라 남편과 함께 소와 돼지를 키웠지만, 딸들이 대학을 졸업하자 미련 없이 축사를 허물고 텃밭 농사만 지었다. 환갑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결혼 후에 계속 일을 하는 큰 딸이 육아 부담을 느끼는 것을 보고, 할머니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권했다. 큰 딸 부부와 손녀는 할머니 집으로 들어왔고, 그 뒤 손자가 한 명 태어났다. 그 사이에 사건이 있었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였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으로 핵발전소 폭발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할머니 집이 바로 월성 핵발전소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가끔씩 발전소 돔에서 압력을 빼느라 수증기가 뿜어져나오는 모습에도, 가끔씩 발전소 쪽에서 들려오던 쿵쿵하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밤들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큰 딸이 둘째 손주를 낳았다. 남자 아이였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공포가 채 사라지기 전, 갓난쟁이 손자를 돌보면서 할머니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아기한테 안좋은 일이 있으면 어쩌나...     


2012년 부산 고리 핵발전소 인근에 살다가 일가족이 암환자가 된 ‘균도네 가족’의 소송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2014년에는 설계 수명이 다한 월성핵발전소 1호기의 수명을 연장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핵발전소 인근에 살면 방사능에 피폭된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주민들은 월성 핵발전소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월성1호기 수명연장을 반대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할머니도 농성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월성 주민들 몸 속에 진짜 방사능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소변검사가 시작됐다. 월성원전민간환경감시기구라는 곳에서 실시하는 검사였다. 민간환경감시기구가 갖고 있는 장비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방사성물질 중 삼중수소의 수치였다. 할머니 가족은 모두 소변을 제출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핵발전소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할머니 가족의 몸 속 삼중수소 수치가 매우 높게 나온 것이었다. 할머니의 수치는 마을에서 가장 높았다. 그리고,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다섯 살 손자의 삼중수소 수치가 마을 어른들 평균치보다 세 배나 더 높았다는 것이다. 얼마 후에 한 방송사가 진행한 비교 검사 결과, 서울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 소변에서는 삼중수소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삼중주소는 유전자의 DNA를 파괴하여 암과 유전병을 일으킬 수 있는 방사성 물질이라고 했다.    

   

“이게 왜 이런가 잘 생각해봤더니, 우리 집에 오래 머무른 순서대로 수치가 높게 나온 거야. 내가 젤 높고, 그 다음 우리 할아버지, 그 다음에 우리 손자. 애들 애미 애비는 울산에 일하러 나가 있는 시간이 많고, 손녀는 울산에서 학교를 다니니까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어. 그러니 세 살짜리 손자가 그렇게 높게 나온 거야” (황분희 할머니 인터뷰 중에서)     


먹는 물이 삼중수소 방사능에 오염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할머니는 경주환경운동연합의 의장을 맡고 있던 동국대 의대 김익중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을 팔팔 끓여 먹으면 괜찮을까요?”


“아주 좋은 정수기로 물을 걸러 먹으면 방사능이 걸러질까요?”


그러나 방사성물질 삼중수소는 물 분자와 결합되어 있어 분리할 방법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할머니는 심한 자책감에 빠졌다. ‘내가 애들 키워준다고 하면서 애들을 사지로 끌고 들어왔구나...’ 할머니는 딸 부부에게 이사를 나가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당장 집을 구할 여력이 안되던 딸 부부가 고민하는 사이, 손녀와 손자가 할머니와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딸 부부와 손자, 손녀는 할머니 내외분과 계속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 일가족은 집과 땅을 처분하고 울산으로 이주하고자 했지만, 그해 9월 경주 지진이 일어났고 그 뒤로는 부동산 거래 자체가 멈춰버렸다. 

당시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지하수를 먹고 있었다. 지하수에 삼중수소가 들어있다고 했다. 그런데, 인근 읍천리에 있는 월성핵발전소 직원 사택에는 멀리 양북면 취수장에서 끌어온 상수도가 들어가고 있었다. 상수도는 핵발전소와 나아리를 지나 읍천리 사택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월성핵발전소를 운영하는 한수원 월성본부를 찾아가서 상수도를 나아리 마을로 연결해줄 수 없느냐고 애원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할머니는 치를 떨었다.      

이후 할머니는 핵발전소 반대운동과 주민 이주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황분희 할머니는 한국 탈핵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황분희 할머니를 처음 뵌 것은 2017년 2월 대전 원자력연구원 앞에서 열린 핵재처리실험 규탄 집회에서였다. 경주에서 대전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원자력연구원과 싸우는 대전 시민들을 격려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노 전사의 넉넉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뒤인 3월 초순,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6주기 탈핵집회 현장에서 두 번째로 할머니를 뵈었다. 헌법재판소가 전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고 새로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탈핵 여론도 높아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소복 차림으로 집회장의 연단에 올라 방사능으로 인한 고통을 절규하듯 증언하고 핵발전소를 멈춰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날의 할머니도 투사의 모습이었다. 


세 번째 만남은 한 달 후, 인터뷰를 위해 찾은 월성핵발전소 앞 농성장에서였다. 막상 현장에서 뵌 할머니의 모습은 핵시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주민의 모습이었다. 양남면에서 가까운 감포읍에 핵재처리실험을 대규모로 할 수 있는 혁신원자력연구단지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할머니와 이웃들은 불안해했다. 네 번째 뵌 것은 그해 가을 국회에서였는데,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갑상선암 발병과 방사선 피폭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주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여하신 할머니의 모습은 어딘가 불편하고 힘들어보였다. 할머니가 갑상선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핵발전소 관련 취재를 계속 해서였는지, 황분희 할머니와의 만남은 뜻하지 않게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2018년 4월에는 후쿠시마를 사고 이후 우리 원전 당국이 주민보호대책을 제대로 마련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또 한 차례 양남면을 방문해서 할머니와 이웃들을 함께 만났다. 이 때, 나는 할머니와 비교적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할머니의 두려움과 고통, 할머니의 삶과 가족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삶과 싸움에 몰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청와대 앞에서 일주일간 출퇴근 농성을 벌이며 이주대책을 마련해달라고 부르짖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와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황분희 할머니는 영화 <월성>의 주인공이 되었다.    

  

영화 <월성>을 찍으면서 황분희 할머니와 손자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가까이서 바라본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였다. 손자를 아끼고 성심으로 돌보는 평범한 할머니. 그 할머니의 얼굴 속에는 피해자의 모습도 있었고 투사의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어머니이고 할머니이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여름에 마당에 간이 풀장을 만드셨다. 손자와 손자 친구는 조그만 비닐 풀 속에 들어가 물총싸움을 하고 물놀이를 했다. 물놀이를 끝낸 손자와 손자 친구는 할머니가 삶아주시는 옥수수를 먹고 수박을 먹었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텃밭에서 기른 각종 채소를 넣고 볶음밥을 해 주셨고, 호박 전을 구워 주셨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가족들을 위해 비트와 사과를 믹서에 넣고 갈아서 싱싱한 쥬스를 만들어 주셨다. 계절마다 살구와 복숭아와 자두와 사과와 배와 감을 간식거리로 식탁에 올려두었다. 이 모든 것들을 할머니는 가족의 건강을 위해 직접 기르고 거두었다. 그러기를 십여 년. 그런데 그 가운데 어느 날, 이 곳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고, 할머니가 기르고 거둔 모든 먹거리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 아득함은 어느 정도였을까. 삶의 밑바탕이 뒤흔들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 <월성>은 그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 그 아득함과 고통의 울림을 핵발전소 전기를 쓰고 있는 대도시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으면 했다. 변화는 그 공감에서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황분희 할머니와의 만남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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