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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태제 Oct 30. 2022

월성의 눈물

핵발전소 인접 지역의 경제와 삶이 핵발전소에 예속되는 이유

영화 <월성>을 촬영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월성 핵발전소에서 직선 거리로 950미터 떨어져 있는 원룸에 기거하면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베란다 문을 열면 정면으로 월성핵발전소 4호기의 원자로 돔이 보이는 방이었다. 정확한 용어로 말하면 격납건물이다. 두터운 콘크리이트 벽 안에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등 핵심 설비가 들어있고 핵분열로 엄청난 열과 방사능이 가득차 있는 구조물이다. 돔 지붕을 지고 있는 회색의 핵발전소 격납건물은 위압감과 함께 묘한 불안감을 주는 존재였다. 나는 매일 아침 거대한 격납건물을 바라보며 ‘오늘도 별일 없겠지’ 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 건물엔 원룸이 스무 개 정도 있었다. 신월성핵발전소를 한창 건설하던 2000~2010년대 초반까지는 공사현장의 노동자들과 주기적인 발전소 정비기간에 일하러 오는 노동자들로 방이 꽉꽉 찼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월성핵발전소 공사가 끝난 후로는 육칠년 넘도록 입주자가 없었다. 내가 머물던 2019년에도 방은 거의 비어 있어서, 비오고 바람 부는 날에 어두컴컴한 건물 복도를 걸을 때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핵발전소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동네 ‘나아리’는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였다. 한 때 흥성거렸을 것같은 퇴락한 번화가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있었다. 상가의 절반은 비어 있었고 예전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술집과 노래방과 병원의 간판들은 녹슬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유리창이 깨지고 벽이 뜯어지고 집기가 부서진 채로 폐가처럼 방치된 건물들도 있었다.      


핵발전소 출입제한구역인 914미터 펜스와 인접한 한 상가 건물 1층에 당구장이 있었다. 4층 건물의 다른 층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당구장도 얼핏보면 문을 닫은 것처럼 보여 건물 자체가 굳게 잠긴 느낌이었다. 그런데, 1층의 당구장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운영하시는 당구장이었는데, 절반은 불이 꺼져 있었고 손님은 없었다. 그곳에 촬영감독과 함께 가끔 당구를 치러 갔다. 주인 아주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늘 TV조선 채널을 보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집이 서울 강남이라고 했다. 신월성 핵발전소를 지을 즈음에 나아리 상가가 호황이라는 소문이 서울에까지 다다라, 노후자금을 들여서 건물을 매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세 들어 있던 가게들이 모두 나가고 커다란 4층 건물이 텅텅 비어버렸다. 건물을 다시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았다. 2015년 9월 경주 지진이 일어난 뒤로는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다고 했다. 당구장도 운영하던 사람들이 나가자,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건물 관리를 겸해 당구장 운영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주머니가 적극 주장해서 부부의 노후자금을 다 쏟아부어 상가건물을 구매한 것이라, 가족들 볼 낯도 없고 해서 이렇게 나아리에 와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핵발전소가 지역 경제를 어떻게 들었다 놨다 하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였다.      


그나마 장사를 꾸준히 하고 있는 곳은 식당들이었다. 주민들도 있지만, 주 고객은 월성핵발전소에서 일하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직원들이나 협력업체 노동자들이다. 그러다보니 혹시라도 한수원에 밉보일까봐 식당 주인들은 늘 조심하는 분위기다. 많은 식당들에 한수원과 핵발전소 홍보물들이 비치되어 있었고, 핵발전소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은 금기가 되어 있었다. <월성> 촬영 중에도 식당 주인들에게 핵발전소 이야기를 꺼내면 등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 중 두 곳의 식당은 좀 특별했다. 


한 곳은 핵발전소에서 약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대로변의 고깃집이었다. 식당의 운영은 주인 아주머니가 하고 있었는데, 남편과 시아버지, 아들 등 3대가 갑상선암을 앓고 있는 가족이었다. 갑상선암은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에게 유독 많이 나타나고 있다. 2011년 서울대학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핵발전소 인근 5km 이내 거주자들 중 여성 갑상선암 환자의 비율이 30km 밖의 거주자들에 비해 2.5배 높게 나타났다. 남성의 경우도 표본은 적지만 원전 주변 거주자들의 갑상선암 발병율이 높게 나왔다. 

고깃집 남성 3대가 갑상선암 환자인 사례는 핵발전소와 관련성이 높아보였다. 한 집안에서 3대가 동시에 갑상선암을 앓는 경우가 드문데다가 갑상선암이 여성에게 잘 발병하는 질환이기 때문이었다. 전국의 핵발전소 인근에 살면서, 핵발전소 운영 이후에 갑상선암을 갖게 된 주민들 중에서 618명이 2014년에 핵발전소 운영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는다. 고깃집 주인 가족들은 이 소송에 원고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영화 <월성>에서는 월성 핵발전소 반경 5km 이내에 살고 있는 갑상선암 환자들이 등장해서 각자의 겪고 있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핵발전소가 갑상선암의 원인이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제작팀은 그 분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직접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고깃집 남성 3대도 꼭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식당으로 찾아가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터뷰 요청 말씀을 드렸다. 주인 아주머니는 재판의 추이와 영화 제작에 관심을 보이면서, 가족들끼리 상의해서 인터뷰 수락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다시 찾아가서 들은 대답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 더 설득을 하고 기다려보았으나 인터뷰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굳이 나서서 인터뷰까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남편의 뜻이라고 했다. 자주는 아니라도 한수원 직원들과 핵발전소 노동자들이 회식을 하러 오는 고깃집 주인 삼대가 핵발전소에 비판적인 내용을 다루는 영화에 출연해서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식당 한 곳은 월성핵발전소에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규모가 꽤 큰 음식점이었다. 주인 내외분은 공기업에서 정년퇴직한 분들이었다. 한참 발전소 건설로 지역 경기가 좋을 때 내외분의 아들이 식당을 열겠다고 해서 건물을 매입했다고 한다. 이곳도 발전소을 짓는 동안 호황을 누리다가 건설 공사가 끝난 후에는 손님이 줄었다. 운영이 어려워지자 아들이 식당 일에서 손을 떼고 싶어했고, 달리 맡을 사람이 나서지 않아 주인 내외분이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직접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규모가 꽤 큰 식당이고 홀도 넓어서 월성원전 직원들이 회식도 가끔 했고 손님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원을 두고 운영을 하기에는 어려운 수준이어서 칠순의 내외분이 직접 모든 일을 하게 됐고, 하루하루가 힘들어서 건물을 팔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이 동네 부동산 가격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손해를 좀 보고 팔고 싶어도 마땅한 거래처가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2015년 9월에 장사를 해 보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매매 계약을 하기로 했는데, 만나기로 약속한 전날 밤에 바로 규모 5.4의 경주 대지진이 일어나고 말았다. 주인 내외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노래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구매자는 연락을 끊고 나타나지 않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경주 대지진이 원투펀치가 되어 이 동네 부동산 거래의 생명줄을 끊어놓고 말았다. 

주인 내외는 결국 이 문제가 핵발전소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닿았고, 나아리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남편 분은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이주대책 촉구시위에 복면을 쓰고 참여했다. 얼굴이 드러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굴을 가려도 소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주 요구 시위에 참여한 후부터 이런 저런 통로를 통해, “장사 그만 둘 생각이냐?” “자제하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러나 주인 내외는 모른척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나마 있던 손님마저 끊겼다. 원전 직원들의 발길도 끊어졌다. 회식도 가장 큰 홀을 갖고 있는 이곳을 두고 다른 식당에서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핵발전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순간, 장사를 하기는 어렵게 된다. 

주인 내외분은 각오를 하고 시작했지만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매일 아침마다 발전소 앞 바닷물 속으로 영원히 걸어들어가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은 사실상 식당 문을 닫은 상태다. 하지만 주인 내외 분은 계속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핵발전소 인근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런 행보를 보이는 것은 정말 희귀한 경우다.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주 고객인 핵발전소와 그 직원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어쩌면 유일한 생존의 길이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핵발전소가 들어서면, 그 상주 직원들과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가가 형성되고, 그 전에 원주민들이 주로 종사하던 농업과 어업의 비중은 크게 줄어든다. 1차 산업 중심의 지역 경제가 핵발전소에 의존하는 상업을 중심으로 재편되어버린다. 자연스레 핵발전소의 흥망성쇠가 그 지역의 흥망성쇠로 직결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핵발전소 인접 지역은 좋든 실든 핵발전소를 계속 건설하고 계속 가동해야만 경제적으로 호황을 유지하게 되고, 따라서 지역 여론은 핵발전소에 우호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지역 주민들은 마음으로는 싫어도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핵발전 활성화를 지지해야 하는 강요된 선택 앞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비단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핵발전소에서는 각종 지원금으로 인접 지역 주민들의 여러 활동들을 후원한다. 지역에서 문화행사를 한 번 열어도, 청년회가 체육대회를 한 번 해도, 마을 공동 사업 하나를 추진할 때에도 발전소 운영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 월성원전본부의 후원을 받는다. 원전은 그야말로 지역사회의 물주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거액의 지원금이 풀린다. 큰 돈이 지역에 풀리면, 이것으로 여러 가지 사업들이 추진된다. 이장들을 비롯해서 마을의 여론을 좌우하는 인물들이 마을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핵발전소에 적극 협조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2015년 월성원전 1호기 수명연장을 추진할 때에는 인접 3개 면의 동의를 얻기 위해 한국수력원자력이 지역상생지원금 명목으로 1,310억원을 풀었다. 이 중 핵발전소와 가장 가까운 나아리에는 66억여원이 들어왔는데, 마을사업을 결정하는 이들은 이 돈으로 마을 수익사업을 하겠다며 풀빌라를 지었고,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과 큰 갈등을 일으킨 바 있다. 이웃 마을에서는 상생지원금으로 빌라를 지었지만 건축업자로부터 사기를 당해 완공이 되지 못하는 사건이 터졌고, 이 사업을 추진했던 이장이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미 지역경제가 핵발전소에 의존하는 쪽으로 고착되어버렸기 때문에 지역에 돈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핵 시설을 지어 지원금을 얻어내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 되어 버렸다. 2021년에 월성원전에 고준위핵폐기물 건식저장시설 ‘맥스터’를 신축하는 댓가로 또 지역에 750억원의 상생협력지원금 지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런 합의를 하는 주체는 한국수력원자력과 경주시, 그리고 인접 3개면의 발전협의회다. 이런 구조가 주민들이 핵발전소와 방사능 피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핵발전소 가동을 계속 연장하고, 핵폐기물 보관 시설 등 핵 관련 시설을 늘리고, 나아가 신규 핵발전소 건설까지 동의하게 되는 이유다. 핵발전을 늘리는 것 말고는 다른 지역활성화의 대안이 없는 것이다. 

한번 핵발전소와 핵시설이 들어오면 피할 수 없게 되는 비극적 운명이 바로 이것이다. 게다가, 핵발전소가 있는 지자체는 발전소 운영을 통해 해마다 막대한 금액의 지방세 수입을 얻는다. 지자체 재정의 상당 부분을 핵발전소 세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핵발전소에 총체적으로 의존하고 속박된 지역경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핵발전소 인접 지역에서 발전소 건설 이전부터 살아오던 주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변화다. 월성핵발전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발전소와 붙어있는 나아리와 나산리는 오래된 농촌이자 어촌이이었다. 물론 발전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가난했다. 그렇지만 대대로 농사짓고 어업 활동을 하면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작한 월성핵발전소 1호기 공사로 인해 지역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월성2호기, 3호기, 4호기, 신월성 1,2호기가 차례로 건설되고 운영되면서 지역경제는 완전히 핵발전소에 예속되어버렸다. 

지금도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주민들이 있지만, 그 안에서 어떤 희망도 찾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나고, 월성1호기 수명을 연장하고, 주민들의 소변에서 방사성물질 삼중수소가 예외 없이 검출되고, 경주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때마다 주민들은 핵발전소가 불안하다고 외쳤고, 핵발전소 인접지역에서 떠나고 싶다고 이주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계속 억눌려왔고, 핵 개발의 광풍 속에 묻혀왔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월성원전 인접지역 주민들은 8년째 이주 요구 농성을 이어오면서 핵발전소 반대운동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어찌할 수 없는 핵발전 예속 경제와 자포자기의 절망에 균열을 내고 있는 분들이 바로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에 참여하고 있는 30여 가구 주민들이다. 그리고 그 맨 앞에 영화 <월성>의 주인공들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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