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존재, 핵발전소
2018년 3월. 후쿠시마에 갔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7주기 특집 프로그램을 위해서 현지 취재를 진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빠듯한 제작 여건 상 사흘 만에 취재를 마무리해야 했다. 후쿠시마 피난민과의 피폭 현장 동행 인터뷰, 후쿠시마 공동진료소 소장 인터뷰, 『관저의 100시간』의 저자 기무라 히데아키 기자와의 만남, 원자력정보자료실 방문 취재 등으로 빡빡하게 일정을 잡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의 문제들로부터 피폭으로 인한 후유증까지 폭넓게 짚어본다는 계획이었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려 밖으로 나오니, 코디네이터를 맡아주신 양 선생의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다테시의 피난민촌으로 이동했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와 일본 사무소의 도움으로 연결된 피난민 안자이 토루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안자이 씨는 중년 남성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이타테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임업 회사에 다니던 중에 원전 사고를 겪었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원전 폭발이 일어난 3월 12일 오후에 반경 20킬로미터 이내의 주민들에게 대피 지시를 내렸다. 40킬로미터 떨어진 이타테 마을은 안전지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바람이 태평양에서 북서쪽으로 불어오는 계절이었고, 방사성 물질은 바람에 실려 몇 시간 만에 이타테 마을 상공으로 날아왔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이타테 마을에는 검은 눈이 내렸다. 30센티미터나 쌓이는 폭설이었다. 안자이 씨는 붉게 녹슨 것 같던 하늘과 공기 중으로 전해오던 쇠가 타는 냄새, 뒤이은 거대한 폭발음과 밤새 검게 쏟아져 내렸던 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검은 눈은 방사성 물질이 눈에 섞여 내린 것이었다. 이타테 마을은 고농도 방사능으로 피폭되었고, 뒤늦게 일본 정부는 이타테 마을 주민들에게 피난 권고를 했다. 그러나, 다테 시에 피난민 촌이 완공되기 전까지 몇 개월 동안 안자이씨는 낮이면 인근 지역으로 나가 있다가도 밤이 되면 잠을 자기 위해 이타테에 있는 집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피폭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목욕을 하면 욕조의 물이 파랗게 변했다고 한다. 그 해 8월, 다테 시에 피난민 촌이 완공되어 안자이씨 부부는 안전하게 옮겨올 수 있게 되었다.
안자이씨 부부가 머물고 있는 피난민촌은 방 한 두 간과 주방 검 거실로 이루어진 목조 가설주택 120여 채로 조성되어 있었다. 많을 때에는 110 가구 이상의 피난민이 머물렀지만, 7년이 지난 후 40여 가구만이 살고 있다고 했다. 거주지를 옮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피난민들은 거의 다 나간 상태였다. 이타테 마을로 돌아간 사람들도 일부 있다고 했다. 안자이씨 부부는 다테 시에 새로 거주할 집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어서, 그 전까지 피난민 촌에 머무를 거라고 했다.
우리는 안자이씨 부부와 이타테 마을을 방문했다. 이타테 마을은 평범한 농촌의 소읍이었다. 큰 길 가에 자리잡은 논들은 황량하게 방치되어 있었고, 논 위에는 검은 포대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흙을 담아놓은 포대들이었다.
논 가운데로 뻗은 도로를 달리면서 차창을 내리고 방사선량을 측정해보았다. 방사능 측정기의 수치는 시간당 0.2~0.3 마이크로시버트를 오르내렸다. 일본의 자연방사선량 수치인 0.03~0.08보다도 3~10배 높은 양이었다.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안자이씨의 옛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방사선량 수치는 1마이크로 시버트를 넘어섰다. 안자이씨의 집 뒤쪽 산비탈에서는 시간당 4.0마이크로시버트까지 올라갔다. 일본의 최대 자연방사선량보다도 50배, 우리나라의 평균 자연방사선량보다 40배나 높은 수치였다. 연간 단위로 환산하면 35밀리시버트. 일반 시민 연간 피폭 제한치인 1밀리시버트의 35배나 되는 높은 양이었다.
사고가 난지 7년이 지났고, 여러 차례 제염작업을 거쳐서 이제는 돌아와서 살 수 있다고 일본 정부가 발표했던 이타테 마을에서 피폭제한치의 35배나 되는 방사선량이 측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안자이씨는 집 뒷산에서 나는 송이버섯을 즐겨 먹었고, 집 앞마당에서 나는 머위싹으로는 튀김도 곧잘 해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이곳에서 나는 것들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집 뒷산의 송이버섯에서 킬로그램당 5,420베크렐의 방사능이 측정된 것이 4년 전의 일이다. 방사성물질의 농도가 킬로그램 당 100베크렐을 넘어서는 식재료는 유통 자체가 안 되는데, 그보다 54배나 높은 수치였다. 안자이씨의 부인은 이제 송이버섯이나 머위싹을 먹으면 죽을 거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안자이씨는 사고 전에 36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에서 토마토, 오이, 콩, 유채를 키웠고 3헥타아르 즉 9천평 규로 논농사도 했다. 다니던 임업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농부로서의 삶을 구상하고 있을 때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 안자이씨의 집에서 동쪽 방향으로 산 너머에 후쿠시마 원전이 있다고 했다. 사고가 나던 날엔 원전 쪽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바람에 실려 날아온 방사능으로 농사의 터전은 모두 오염되고 말았다. 안자이씨는 지금도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논과 밭과 산과 숲에 쌓이고 스며든 방사성 물질들은 몇 차례의 제염 작업으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흙 속에서 계속 스며 나와 바람이 불면 마을 곳곳을 다시 방사성 물질로 뒤덮어버리고 있었다. 최소한 300년은 지나야 그의 고향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안자이씨는 농사의 터전이었던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아픔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의 옛집 창고에는 40년 된 트랙터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높은 농도의 방사능이 아직 남아 있는 환경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우리 일행은 1시간 여 만에 이타테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나미에마치를 방문했다. 나미에마치는 후쿠시마 사고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을 입구의 주요소 뒤편에는 그날 버려진 차량들이 녹슬어가고 있었고, 마을 안쪽은 건물들은 유리창이 깨지고 무너진 채로 낡아가고 있었다. 마을은 폐허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큰 길에서 측정해 본 방사선량은 이타테마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방사능 농도가 높은 핫스팟에 접근하지 않고 마을을 전체적으로 둘러본 후, 안자이씨 부부를 다테시의 피난민촌으로 모셔다 드리고, 후쿠시마 시내의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호텔을 떠날 때, 나는 신발과 바지를 벗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코디네이터인 양선생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타테 갈 때는 버려도 되는 신발과 바지를 준비하라고 해서 여차하면 버릴 생각으로 낡은 등산화를 한 켤레 챙겨갔던 것이다. 정말로 이타테 마을에서 방사능 수치가 높은 지역을 다니고 보니, 아이들이 생활하는 서울 집으로 그 신발과 바지를 갖고 갈 수가 없었다. 너무도 당연히 방사성 물질이 묻어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 아깝기도 했지만 눈 딱 감고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호텔 문을 나섰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양선생은 일본을 떠날 때까지 나를 놀렸다. 그러나, 결코 과민한 행동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후쿠시마 시내에 있는 공동진료소를 방문했다. 진료소장인 후세 사치히코 박사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후세 박사는 군마현에서 의사로 일하던 중 원전사고가 일어나자 후쿠시마 현으로 가서 의료지원 활동을 시작했고, 피폭 위험이 있는 주민들의 갑상선을 진단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해서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2012년에 후쿠시마 공동진료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피폭당한 주민들을 진료해오고 있었다. 그는 원전사고 이후 후쿠시마 주민들에게 나타나는 건강 영향을 주시하면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후쿠시마 사고 후 소아 갑상선암이 크게 증가했다는 소식이 보도된 바가 있어서 정확한 상황을 자세히 듣고 싶었다.
후세 박사는 잘 정리된 차트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소아 갑상선암 의심 판정을 받은 환자의 수가 197명, 수술을 함으로써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의 수가 160명을 넘겼다고 한다. 이는 후쿠시마 현에 거주하는 약 30만 명의 소아·청소년들을 전수 조사해서 발견한 수치다. 비율로 따지면 1,500명~2,000명당 1명의 환자가 발생한 것인데, 20만 명 중 한 명 꼴로 발병하는 세계 평균치와 비교를 하면 100배 이상 높은 발병율이라는 것이다. 같은 기간 동안 아오모리 현의 소아·청소년 21만 명 중에서는 갑상선암 확진 환자가 1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갑상선암은 원전 사고 시 방출되는 가장 대표적인 방사성물질인 요오드131에 의해 유발되는 것으로 국제보건기구(WHO)가 인정하고 있는 질병이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도 소아갑상선암이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후쿠시마 현 내 소아갑상선암의 급격한 증가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후쿠시마 현과 일본 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건강검토위원회는 소아갑상선암 증가를 원전 사고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검사를 많이 하다보니 많이 발견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세 박사는, 소아갑상선암 발병율이 원전사고 때문에 증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관련 의료비와 피해배상을 모두 국가가 책임져야 하고 앞으로는 원전을 가동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소아갑상선암 뿐만이 아니었다. 성인들의 갑상선암 환자 수도 2013년이 사고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성인의 갑상선암 발병 시기가 방사능 피폭 후 평균 2년 6개월이라는 점에서,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폭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후세 박사는 분석했다.
또한 위암의 경우도 발병율이 2012년에 10% 이상 증가했다. 악성 림프종과 백혈병의 남성 환자수도 2013년에 2011년에 비해 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후쿠시마 현과 인근의 이바라키, 미야기, 이와테 현에서는 태아 사산율이 2012년부터 약 12%나 급증했다고 한다. 소아 갑상선암, 성인 갑상선암의 극적인 증가와 사산율, 위암, 혈액암 발병율 증가 등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피폭의 후유증이 심각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후쿠시마 현은 이를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건강 피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핵발전소 운영사업자와 관료들, 그리고 방사능 문제에 무관심한 주류의학계에 맞서서 끊임없이 사실을 말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일은 무척 고달픈 작업이다. 주류 의학계의 외면, 관계 당국의 비협조, 넉넉하지 않은 재정 등으로 일상적인 어려움이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 피폭된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공동진료소를 이끌어가고 있는 후세 박사는 참 존경스런 인물이었다.
후쿠시마에서 만난 피난민 안자이씨와 후세 박사를 통해, 원전 사고의 후유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뼈아픈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도쿄로 향했다.
도쿄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쿄에서 만난 사람은 『관저의 100시간』을 쓴 기무라 히데아키 기자였다. 기무라 기자는 이 책을 통해, 후쿠시마 사고 당시 일본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이유를 심층적으로 파헤쳤다. 당시 아사히 신문사 기자였던 기무라씨는 이 책을 출판한 후 비영리 독립언론 ‘와세다 크로니클’을 설립하여 대표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기무라 기자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사고 당시 일본 정부의 대처에 초점이 맞춰졌다. 기무라 기자는 후쿠시마 원전 현장을 포함한 도쿄전력의 정보가 제대로 총리 관저에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을 핵심적인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인 은폐라고 보지는 않았다. 도쿄전력 본사와 후쿠시마 원전 현장, 총리 관저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원전 사고 자체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다고 보고 있었다. 설령 도쿄전력과 총리 관저 사이에 정보가 백퍼센트 투명하게 공유된다고 해서 연쇄적인 폭발 사고를 막을 방법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지진과 쓰나미 이후, 후쿠시마 제1원전에 전기 공급이 끊어지고 비상발전기를 가동할 수 없어 냉각수 순환이 멈추고 멜트다운이 일어났을 때, 후쿠시마 원전 현장에서는 원자로를 식히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바닷물을 투입하고 있었지만, 이런 노력도 원자로 수소폭발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가 이타테 지역을 피난구역으로 정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많은 이타테 주민들이 피폭을 당해서 문제라고 하지만, 이타테 지역이 고농도 방사능으로 오염되었다는 정보를 정부가 공개했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방사성 물질이 이타테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가 없었고, 오염 상황을 파악한 시점은 이미 주민들이 대규모로 피폭당한 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각기 열심히 했지만 후쿠시마 원전 1,3,4호기의 수소폭발을 막을 수 없었고, 멜트다운도 막을 수 없었다. 4호기의 폐연료봉 저장 수조 화재가 진압되고 폐연료봉이 공기 중에 노출되는 최악의 참사가 벌어지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진의 여파로 4호기 예비 수조의 물이 폐연료봉 저장 수조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운이 좋아서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무라 기자와 대화를 하면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였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결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다. 기무라 기자는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결국 그런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누가 원전 안에 들어가서 원전을 스톱시킬 것인가예요. 이건 결국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을 것인가의 문제죠. 군대인가, 경찰인가, 아니면 소방관인가. 누구라도 좋습니다. 그 논의를 회피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리칼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았다.
참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원전 사고라는 것은 현실적인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고를 가정하고 대비책을 점검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인 감각을 준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부산과 경주, 영광, 그리고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다니면서 후쿠시마와 같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주민을 보호하는 대책이 있는지를 취재할 때에도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과 답변들이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으로 느껴졌다. 바람의 방향을 고려한 대피 매뉴얼과 주민 보호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고, 지진이나 침수 등 자연재해와 방사능 유출사고가 동시에 발생할 때 주민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 방안은 현실적으로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자체의 원전방재담당자들도 최선의 노력과 모색을 하고 있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대처하긴 어렵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이처럼 극단적인 상상을 강요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그런 극단적인 상상을 현실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논쟁하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극단적인 현실인가. 결국, 원전, 핵발전소 자체가 극단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