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을 챙겨 먹었다. 열 시 반쯤이었으려나. 밥을 먹고 나면 보통 잠이 쏟아지곤 하는데, 오늘은 낮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제 마신 와인의 숙취가 제법 번거롭게 굴었기 때문이다. 몇 번을 비워냈을까, 비워낸 만큼 배가 고플 만도 한데 전혀 끼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종로에서 약속이 잡혔다. 워낙 좋아하는 동네이기도 하니 약속시간 보다 여유 있게 올라가 여기저기 돌아다닐 요량이 피어났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기도 했지만, 이곳 역삼동은 영 정이 안 간다. 대로변의 높은 빌딩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감을 주는 것과 더불어, 좋아하는 동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교통편이 없는 것도 이 동네를 좋아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집을 나서 버스 정류장을 앞에 둔 횡단보도에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 경적소리로 소란스러운 거리에서 침묵을 지키는 느낌. 왜 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밝은 볕을 받는 듯했다. 겨울을 맞기 전 스스로를 빛내는 건 아니었을까, 눈에 띄게 앙상해진 가지가 쓸쓸해 보였다. 쓸쓸한 가지는 유난히 밝은 볕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강 아래쪽은 평일 오후 3시에 버스에 올라타도 한적함을 느낄 수 없다. 지나는 풍경에서도 그렇고, 버스 안에서도 그렇다. 이 동네에 뭐라도 있는 듯 바삐 이곳을 벗어나려는 조급한 움직임들, 평일 오후 버스의 한적함도 이곳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강을 건넜다.
긴장이 풀렸을까, 숙취가 해소된 것일까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처음 목적지는 경복궁이었지만,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일단 종각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에는 먹을 것들이 많으니까. 간단히 허기진 배만 가라앉힐 생각으로 식당을 고르려 하니 걸리는 게 많다. 이럴 때 자주 먹곤 했던 김밥도 오늘은 영 아니올시다.
그저 발길이 이끄는 데로 걸었다. 핸드폰은 잠시 주머니에 넣어 놓는다. 우연이 나를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은근한 기대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동네에는 고목이 많다. 잎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고목은 가지를 드러내도 앙상하지 않다. 굳건히 겨울을 지켜 줄 것만 같은 듬직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대로의 건물들이 쏟아져 내려도 나무의 품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얼마나 걸었을까 한식뷔페, 한 끼에 6천 원쯤 하는 급식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당 할법한,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종로거리에서의 우연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러니 어찌 종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른 저녁을 먹는 건지 늦은 점심을 해결하는 건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강남 거리에서 마주친 나무처럼 곧 닥칠 겨울을 준비하는 듯 사람들의 얼굴엔 앙상한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창백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여유를 운운했던 것이 어쩐지 낯 부끄러워졌다. 사람들도 다가올 추위를 버티기 위해 부단히 준비 중인 것 같다. 배를 채우고 가을 내내 좋아했던 거리를 돌아봤다. 광장의 상쾌함과 눈앞에 걸리는 북악의 위엄도 그대로였지만. 그렇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