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순종하면 안될까요?”
2018년 4월경, 두 번째로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했다. 출판사 디자이너로 이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달콤한 휴식을 누리던 때 불현듯 한 문장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지금 출판사를 시작해라.”
터무니 없는 생각에 당황스러웠지만 잡념이라고 여겼다. 퇴사한 김에 떠오른 설레발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떠오른 그 문장은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졌다. 불편한 마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이면 어떡하지…?’이 불편함은 나의 미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데서 찾아왔다. 안정된 미래 설계를 위해서는 안정된 월급이 필요했다. 즉, 28살의 나이에 창업은 선택지에 없던 경로였다. 앞만 보고 달리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나는 떠오른 생각의 진위여부를 알기 위한 멈춤의 시간을 가졌다. 퇴사를 하고 라식 수술이 예약되어 있어서 몇개월간은 타당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쉬는 동안 부르심의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기만을 바라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출판사를 지금 시작하라는 문장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맞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나중에 제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나이도 어리고, 모아둔 돈도 없고, 출판 경력과 인맥도 없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순종을 협상하려고 했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귀를 닫고, ‘아직은 아니에요’라는 방어막 뒤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기 급급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던 돈의 우상이 있었다. 사업을 하면 매달 수익을 예측하기 어려워 진다. 더군다나 그 당시 상황으로 사업으로 바로 뛰어드는 것은 맨땅의 헤딩이었다. 돈을 모으기는커녕 오히려 있던 돈 내려놓아야 할 결심이 필요했다. 나에겐 30살까지 저축 기준이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적당함’의 범위였다. 적당히 당당하고, 적당히 안정적이고, 적당히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정도로 말이다. 큰 욕심도 아니겠거니, 구태여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 적당한 기준마저도 포기하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했다.
“이 정도 안락함도 못 바래나요?”
하나님은 인격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싫다는데, 그럼 존중해 주시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회사를 오래 다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왔었다. 나는 창조적 열정과 개척 정신이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보며, 이미 정해진 틀에 순순히 따르기보다 나만의 답을 찾아내기를 즐겼다. 10살쯤이었을까. 이러한 기질을 파악하고 미래에 나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어른이 되면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 그러면 회사는 오래 다니지 못하겠지?’ 그리고 한 가지 소원이 덧붙여졌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무엇이 창조적인 일인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소원은 내 마음에 설렘을 주었다.
어른이 된 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리라 생각했다. 아이의 순수함은 믿음만으로 온전히 기뻐할 힘이 있다. 현실적인 상황을 저울질하거나 이득을 따지는 계산적인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니 믿음만으로 기뻐하기 어려웠다. 어떤 일을 하기 전 내게 찾아올 수 있는 손해를 계산하고 있었다. 순종을 협상하려는 기간 동안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세상의 우상이 차 있는지 보게 되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다. 내가 꿈꾸는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앙과 믿음은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줄곧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고 기도해 왔다. 그러나 그 고백은 올바른 믿음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나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