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 팀원으로 내려간 지 100일 정도 되었던 21년 3월 어느 날 일어났던 실제 이야기를 두 편으로 나누어서 글을 올린다
팀원으로 내려간 후 내가 맡은 일 중의 하나가 내가 속한 조직의 주요 행사를 사내에 공지를 하는 것이었다. 행사 공지를 온라인 사내 게시판에 하고, 행사 포스터를 직접 붙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보통 사원이나 대리급에서 하는 일이다.
내가 행사 문안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본 옆자리 후배가 이렇게 말한다.
“제가 행사 공지 해 드리고 포스터 붙어 드릴까요? 이런 일 하시기 좀 그렇잖아요."
"아냐 내가 할게. 앞으로 이 행사는 내 담당인이니 내가 해야지. 처음이야 좀 그렇지만 익숙해지겠지."
이렇게 해서 회사 게시판에 행사 공지가 내 이름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회사 후배들이(주로 팀장급) "행사 공지를 이제 선배님이 하네요." 힘내세요. 하는 격려의 카톡도 꽤 왔었다.
다음으로 내가 할 일은 더 힘든 코스이다. 내가 일하는 빌딩(강남)과 본사 빌딩(강북) 모든 층에 행사 포스터를 붙이는 일이다. 지금은 모두 전자 보드로 바뀌었는데, 당시에는 아날로그였다.
이 일은 솔직히 정말 하기 싫고 쪽팔렸다. 종이 포스터를 각 층에 몇 장씩 붙여야 하는데,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볼 텐데... 그래서 사람이 없는 이른 새벽에 회사에 와서 붙이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늘작가야. 네가 이런 일을 쪽팔려하면 앞으로 부장 팀원으로서 어떻게 회사 다닐래? 이렇게 하려면 회사 때려치우고 명퇴해라."
내면의 진짜 늘작가가 이렇게 돌을 깨 주었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이왕 붙이는 것 오늘 오후 본사 사람 많이 일하는 시간에 가서 당당하게 창피해하지 않고 포스터 붙이러 가자!"
내면, 자아(출처 : 현대불교, 그림 : 최주현)
택시를 타고 본사 앞에 도착하여 보무도 당당히(?^^) 회사 안으로 들어가던 중 로비에서 평소 잘 아는 본부장 한 사람을 만났다.
“반가워요. 0 본부장님 잘 지내시지요?”
"어쩐 일 이세요? 본사에 다 오시고?”
“아 네, 00 행사 포스터 사내 붙이려고요. 팀원으로 내려가서 제가 이제 직접 해야 해서요,”
알고 있겠지만 팀원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 명퇴하지 않으셨네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내가 회사 계속 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날 또 한 번 느꼈다. 내가 팀장인지, 팀원인지, 회사 다니는지 아닌지, 관심 가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다들 바빠서 본인 앞가림도 쉽지 않은 것이다.
“참 조만간 점심 한 번 사주세요. 올해 본부장님 되시고 한턱 쏘지않으셨잖아요?”
평소 친하게 지냈고 이 정도 이야기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 말 들은 본부장 반응이 나를 한 방 먹였다.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좀 바빠서 점심 먹을 시간도 없네요.”
이 사람은 내가 팀장일 때 점심을 가끔 먹었다. 당시 내가 힘 있는 팀장이라 이 본부장이(당시에는 팀장) 항상 먼저 밥 먹자고 해서 같이 한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팀원이 되었니 금방 이렇게 변한 것이다. 그냥 빈말이라도 "네 다음에 연락할게요" 하면 될 텐데…
씁쓸한 마음이었지만, 내면 속 찐 늘작가가 또다시 한번 세상 밖으로 나왔다.여기서 그냥 사라지면 내가 아니지!
이 말을 듣고 나는 본부장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네, 많이 바쁘시네요. 저에게 점심 한 끼 사줄 시간이 없으실 정도이니... 그렇게 일 열심히 해서 꼭 내년에 임원 다시어 부장 본부장 딱지 떼시고, 이 회사 사장 되세요."
우리 회사에서 본부장은 두 가지 케이스가 있다. 상무 승진이 된 임원급 본부장과 부장급 본부장이 있다. 그리고 부장급 본부장 중에서는 임원 후보군과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임원 되기는 불가능한 사람 두 케이스가 또 있다. 이 본부장은 후자, 즉 내년에 죽어도 임원이 못 되는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돌려 까기가 아닌 직진으로 받아 버렸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 본부장 얼굴색이 엄청 안 좋아지더라. 유쾌, 상쾌, 통쾌! 참고로 늘작가는 뒤끝 작렬이다. ㅋ
이때 회사 인간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 것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씁쓸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지금은 내가 약자인 것을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나. 이 사람은 내가 팀원이 되었다고 약자가 되었다고, 당장 이렇게 변하는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세상을 살다 보면, 회사를 다니다 보면, 약자에게 강한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역으로 강자에게는 약한 스타일이다. 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다 그렇다. 나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진정 강한 사람은 약자에게는 약하고, 강자에게는 강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에게 점심 살 시간 없이 바빴던 그 본부장은 지금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 다음 해에 본부장에서 물러나고 나와 같은 신세로 된 후 명퇴 수용하고 이 회사 떠났다.
이 날 나에게 명세한 것이 있다. 인생 길다. 이 회사에서 내가 부장 팀원 되었다고, 약자라고 강하게 대하는 수많은 인간들 한번 두고 보자. 내가 정년 퇴직한 이후 당신들과 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때 진검 승부 다시 해 보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