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아픔 매화꽃 향기

당고개 순교성지

by minsan민산


지하철 4호선 역과 이름이 똑같은 당고개 성지는 원효로와 용산이 만나는 신계 역사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두 10분이 순교하고 그 가운데 9분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나머지 한 분 이성례 마리아는 굶어 죽어가는 갓난아기 때문에 배교했던 일이 있어서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다가 지난 2014년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포로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다.


박해시기에 죄인들을 처형하던 곳은 서소문 밖 네거리였다. 그러나 기해박해 막바지인 1840년 1월 설을 사흘 앞둔 때에 설 대목장을 앞둔 상인들이 처형장을 다른 곳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청해서 근처 당고개에서 10분의 신자가 처형되어 순교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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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기가 내 인생의 바닥이구나 싶었을 때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써 움직여 찾았던 곳이다. 미사가 끝나면 주위를 서성이다 하늘 한번 보고 땅 한번 보고 그러다 돌아온 곳이었다.

공원 입구 산책로에는 '마음이 쉬어가는 곳'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이곳은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순교자들의 영혼이 차분하고 단아한 한옥에 머물고 있는 천주교 순교 성지입니다. 산책로를 걸으며 참된 진리와 자유에 대해 묵상하다 보면 자잘한 일상의 갈등이 작게 느껴집니다."


나의 일상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숨도 못 쉬게 아프고 힘든데 자잘하다니. 진리와 자유를 생각할 틈도 주지 않는데 내 고통의 크기를 왜, 무슨 자격으로 규정하는 건데... 마음은 흙탕물이었다. 그런데 또 숨이 쉬고 싶을 때면 쉬이 찾아가 머물 곳이 거기밖에 없었다. 그렇게 울며 투덜거리며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렇게 오가며 그곳의 순교자들에 대해 알아가면서 이성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조금씩 내 생각의 방향이 나의 고통에서 이성례 마리아의 고통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분도 엄마였고 나도 엄마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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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례 마리아와 최경환 프란치스코 부부는 박해를 피해 가며 교회를 돕던 열심한 신자였다. 이 부부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던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이다. 이들은 박해의 눈을 피해 안양 수리산 기슭 뒤뜸이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면서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이 들이닥쳐 이 가족은 젖먹이 갓난아이까지 줄줄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배교하라는 고문과 매질은 심해졌고 결국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옥에서 순교한다. 젖먹이 막내아들은 옥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숨을 거두게 되고 이때 죽어가는 아기를 보며 엄마로서 느꼈을 고통과 신념의 갈등에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옥에 갇힌 네 아들을 살리기 위해 회유에 마음이 흔들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지만 큰 아들이 외국으로 천주교 유학을 갔다는 이유로 이내 다시 체포되었을 때에는 남아있을 아이들을 단단히 당부시키고 이전의 배교를 취소하며 순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고개 성지 내 기념관에는 심순화 화백이 그린 이성례 마리아의 일생을 담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처형장으로 가기 전날 옥에 갇힌 엄마는 옥 문살 밖에 앉은 둘째 아들 최희정 야고보의 머리를 빗겨주는 그림이 있다. 아마도 어린 동생들을 당부하며 엄마와 아버지, 형의 신앙에 대한 신념과 선택을 담담히 전해주었겠지.

이성례 마리아는 마지막 유언과 함께 형장에는 오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 신부)가 오기를 기다려라."


15살이던 둘째 야고보는 또다시 엄마의 마음이 흔들릴까 봐 우는 동생들을 달래며 마지막 발길을 돌리고 그동안 구걸하며 모은 몇 푼의 돈과 쌀자루를 메고 엄마를 처형할 희광이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이렇게 부탁했다.


"우리 어머니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주세요."


야고보와 형제들은 형장이 바라보이는 먼발치에서 엄마의 순교를 지켜보고 저고리를 벗어 흔들며 예를 갖췄다고 한다. 당시에 성 안에서 처형된 죄인의 시신은 지금의 광희문인 시구문 밖으로 버려졌다고 하는데 어린 형제들은 시신 더미에서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찾지 못했고 형리들의 배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가족들이 살던 수리산에 모셔 묻었다고 한다.


신앙에 대한 신념으로 부모를 잃은 야고보는 이후 어린 동생들과 어떻게 살았을까 몹시 궁금했다. 15살 소년에게 주어진 생존의 의무와 신앙의 가치는 또 얼마나 가열한 고통이었을지.


자료에 의하면 둘째 최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일가 친척집에 맡기고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1849년 형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돌아오고 나서 형제들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야고보는 충북 진천의 바라산 교우촌에서 살다가 선종했는데 세 아들 중 막내아들 최유종의 손자가 원주교구의 최기식 신부님이라고 한다.(장영돈 저,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여정)


20220920_122835.jpg 당고개 성지 옥상 정원의 야외 제대


물에 빠져 발버둥 칠수록 몸은 점점 가라앉지만 온전히 물속에 내 몸을 내어놓을 때 우리 몸이 떠오르는 것처럼 내 삶의 고통도 당해주겠다 마음먹고 받아들일 때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알게 된 순간이 있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이 비로소 가슴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 참된 진리와 자유를 묵상해서 일상의 갈등이 작아진다기보다 일상의 갈등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를 알게 된 이유이다. 이렇게 나는 바닥을 딛고서 납작 엎드려 이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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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성지는 박해의 고통을 찔레꽃 아픔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매화꽃 향기로 삼아 상징적으로 조성되었다. 담벼락의 문양은 옹기 조각들로 매화 꽃잎을 표현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성지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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