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성당-좌포도청-이벽의 집-전옥서-의금부-우포도청-형조-124위 시복터
언제부터인가 곳곳에 가닿는 지하철 망이 갖춰지고 나서 지하로 이동하고 지하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정확한 시간 관리가 가능하고 이동시간 내에 책을 본다든지 음악을 듣거나 강의를 들을 수도 있고 심지어 아침잠 때문에 미처 완성하지 못한 섬세한 메이크업이 가능한 이동수단이 지하철이다. 종로에 위치한 회사에 6년을 출퇴근하면서 나 역시 지하철 1호선을 이용했고 6년 동안 땅 속을 오고 갔다.
지금은 대학생들의 거리, 젊음의 거리라고 하면 홍대 앞을 떠올리게 되지만 아주 오래전 1980년대 젊음의 거리, 대학생들의 거리는 종로였다. 그중에도 종각역이 있던 종로 2가.
지금은 롯데리아와 커피빈이 있는 건물인 듯한데 당시 종로서적과 그 옆 빵집 고려당 앞은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장소였고 특별한 약속 없이 근처를 서성거려도 친구 한 두 명은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대로변에서 한 블록 뒤로 가면 주머니가 넉넉지 않았던 대학생들이 주로 가던 술집들이 즐비했고 그곳을 '학사주점'이라 불렀다. 2천 원만 있으면 소주 한 병과 조개탕을 먹을 수 있던 곳. 대학생들의 유일한 아르바이트였던 과외도 금지되고 세상은 보지 말아야 할 것, 말하지 말아야 할 것,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짓누르고 있던 시절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이 유일한 숨구멍이었던 시절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첫 직장이 인사동이었고 그곳에서 이직한 곳이 대학로. 20대의 많은 시간이 종로에 머물렀다. 그 후 광고회사로 이직하면서 나의 활동반경은 강남으로 옮겨졌고 애써 찾아갈 일이 없던 곳 종로. 참으로 추억에 젖을 만한 세월이다.
그리고 50세가 되어 다시 종로에 직을 두고 6년을 오고 갔지만 역시 땅 속으로만 다니다 보니 30년 전 젊음의 한 자락을 보냈던 종로통을 이번 순례길에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종각역 부근은 방향의 지표로 삼던 건물들이 너무도 변해버려 발걸음을 멈춘 적도 많았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그리고 나도 많이 늙었구나.'
우리는 크든 작든, 공적이든 사적이든 내가 속한 조직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그 조직 안에는 또 여러 성향의 무리들이 존재한다. 보통 어느 무리든 내가 속해 있어야 안도감을 느끼며 그들을 나의 우군으로 삼아 다수의 이점을 누리기도 한다.
또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는 변방의 독립군들도 존재하는데 그들끼리 한두 명 마음이 맞으면 어울리는 그룹이다. 나는 변방의 독립군에 가까웠다.
우리는 여러 명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동질성을 확보하고 의견의 만장일치를 통해 급속도로 유대를 강화시켜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공동의 적이 있을 때 혹은 공동의 적을 만들어 가는 때인 것 같다. 바로 거기에 사용된 카드가 나였던 적이 있었다.
어제까지 함께 차를 마시고 웃으며 이야기하던 동료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쯤이야 그럴 만했나 보다 하며 견딜 수 있지만 나와 무관하던 무리가 그 동료가 들어간 후 나에게 가하는 무리한 언행들. 어떻게든 나에게 수모를 주어서 내가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그것을 느끼거나 들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되묻거나 받아치면 속 시원하련만, 왜 나는 그런 순간에도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상황들, 나의 행동에 따른 결론들과 같은 온갖 생각들이 초고속으로 펼쳐지는지.
나는 비교적 눈이 크기 때문에 전 방향 180도에 가깝게 시야가 열려있으니 내 옆에서 내게 보내는 눈빛의 온도도 거의 느낄 수 있었단 말이지.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분명하기에 이렇게 생각이 길어지다 때를 놓치곤 한다. 사실 때를 놓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의 링에 들어가기 싫었다. 이것이 '나'인 것이고 이것이 최소한의 자기 방어였다.
이런 날이면 회사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걸었고 점심시간이 오면 종로 성당 어두운 감실 앞으로 숨어들어 호흡을 고르곤 했었다. 회사에서 길 하나 건너 조금만 걸으면 종로 성당이 있었다. 지형 탓인지 1층에 위치한 성전에는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감실을 밝히는 빨갛고 작은 불빛만 보이는 고요한 성당.
또 그곳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서 가끔 평일 낮에는 오르간 연주자가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날이면 묵직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나를 차분히 잠재웠고 다시 회사로 돌아갈 용기를 주었던 그런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다른 회사로 이관되었고 직원들의 승계 작업이 진행될 때 나는 승계를 포기함으로써 그들과의 싸움에서 기권을 선언했다. 업무로 힘든 것보다 사람 때문에 힘든 것이 더 괴로운 것처럼 긴 시간 마음은 아팠지만 이 또한 50세가 넘은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였다.
종로 일대는 조선시대에 여러 관청들이 위치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좌포도청, 우포도청, 의금부, 전옥서 등이 종각 역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형조는 광화문 광장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의 경찰서, 검찰청, 법무부, 구치소 같은 곳이 종로 이곳저곳에 있었던 셈이다. 이 관청들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교인들은 끌려가서 죄인으로 판결받고 고문과 매질로 죽음에 이르기도 했던 것이다.
많은 순교자들이 끌려와 고난 받고 죽음에 이르렀던 이곳들을 신앙의 증거터로 삼아 '포도청 순교성인'이라 부르게 되었고 2013년 종로성당이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승인되었다.
이곳 지하에는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이 꾸며져 있어서 박해의 역사와 당시 고문에 사용되었던 기구와 형틀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도 있었다. 이때에도 보지 말아야 할 것, 말하지 말아야 할 것,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포도청에서 순교한 많은 분들 가운데 103위 성인 중 24분과 124위 복자 중 5분이 계시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 광장에서 124위의 복자를 선포하였는데 그분들이 죄인으로 판결받고 모진 고문과 매질로 죽음에 이르렀던 바로 그 자리, 주변에는 포도청과 의금부가 있고 형조 터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복자로 선포되는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 좌포도청 터 - 종로 3가 옛 단성사 터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좌포도청이 설치되어 있었고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고 있던 신자들이 순교한 을묘박해의 현장이다.
○ 이벽의 집 터(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 이승훈 베드로가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가 출발한 곳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가 이루어진 곳이다. 청계천 수표교 근처에 표지가 세워져 있다.
○ 전옥서 터 - 종각 역 사거리 제일은행 맞은편에 위치하고 조선시대 죄인들이 갇혀있던 감옥이었다. 형벌과 고문으로 이곳에서 두 분의 성인이 탄생했다.
○ 의금부 터 - 전옥서 터 맞은편 제일은행 앞에 표지석이 위치한다. 조선시대 관리나 양반들의 죄를 다스리던 곳이다. 박해시기에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구금되어 문초를 받던 곳이다.
○ 우포도청 터 - 광화문 사거리 동아일보 옆 광화문 우체국 앞 도로변에 표지석이 있다. 도성의 서쪽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성인 중에서 14살 어린 나이에 순교한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순교한 곳이다. 당시 포졸들이 빨갛게 달아오른 숯불을 입에 넣겠다고 하는데도 모진 고문 속에서 의연한 어린 유대철을 보고 어린이를 처형하는 것을 두려워한 끝에 포졸들이 목을 졸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전해진다.
○ 형조 터 - 광화문 광장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가 방문한 때에는 광화문 개발공사가 막 끝난 후여서인지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는데 몇 번을 오고 간 끝에 세종문화회관 조형물 아래 아마도 임시로 치워놓은 듯한 형조 터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
○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으로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이 거행된 곳. 광화문을 바라보는 광장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끌려가 고문받고 죄인으로 순교했던 포도청 거리이고 바로 옆 숱한 순교가 이루어졌던 서소문 성지가 위치한 곳이어서 죄인으로 숨을 거두었던 그분들의 순교가 복자로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모두 100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모였고 나 역시 새벽 5시부터 움직여 참석했던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