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회심

가회동 성당 - 석정보름우물 - 경기감영 터

by minsan민산


구름이 짙은 날이었다. 10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안국역 뒤쪽 북촌마을 어귀를 찾았다. 가회동 성당은 나에게 첫 방문길이었다. 2014년에 새롭게 지어져 봉헌된 가회동 성당은 한옥과 양옥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어서 근처의 건축물과도 멋스럽게 어울렸다.


1층 전시실에는 우리 초기 교회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가회동 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는데, 이곳에서 우리나라 천주교 박해의 중심이었던 조선왕실의 회심 기사를 처음 보게 되었다. 올해 나는 일 년 동안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었다. 한동안 성당 마당에 앉아 바오로의 회심과 겹쳐 많은 생각들이 이어졌다.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 신자들은 북경교구에 오랜 시간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고 1794년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게 된다. 당시 역관이었던 최인길 마티아는 북촌 계동에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마련해서 이곳으로부터 전교 활동이 펼쳐지게 된다. 세례와 성사들이 거행되고 1795년 우리나라 최초의 부활대축일 미사가 거행되기도 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때 4천 명 정도였던 신자가 5년 후에는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이 내리게 되자 최인길 마티아는 스스로 주문모 신부 행세를 하며 대신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 하루 만에 순교하게 된다. 그리고 신부의 입국을 도왔던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역시 체포되어 고문과 매질 끝에 포도청에서 순교한다. 당시 최초의 여회장으로 주로 여성들에게 전교하던 강완숙 골룸바는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모시게 된다.


박해가 심해지고 신자들이 고문과 매질로 죽어가면서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슬퍼하며 중국으로 향하다가 목자가 양들을 두고 어찌 떠날 수 있냐며 다시 발길을 돌려 자수하여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다.


이 초기 교회 공동체가 북촌 계동에서 이루어졌고 그 자리가 바로 가회동 성당이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최인길 마티아, 강완숙 골룸바,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다섯 분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죄인으로 죽음을 맞았던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복자 최인길 마티아, 복자 강완숙 골룸바, 복자 윤유일 바오로, 복자 지황 사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바오로 서간문은 로마의 박해 속에서 이스라엘 밖 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뜨거운 외침이고 간절한 당부의 글이다. 2천 년 전 바오로 사도는 지금의 튀르키예와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찾아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떠난다. 육로로 또는 항해하며 폭풍우도 만나고 난파도 되고 감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으면서 복음을 전한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다른 지역의 공동체에 절절하고 단호한 편지를 통해 가르침과 위로, 신앙의 당부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신약의 바오로 서간문이다.


바오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 사건 이후 예루살렘의 고위직 기득권층이었던 그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고 먼 지방까지 쫓아 가 잡아가는 지도자급 박해자였다. 젊은 부제였던 스테파노를 광장의 무리들이 돌로 쳐 죽일 때 군중은 바오로(회심 전에는 사울이라 불렀다)의 발 밑에 겉 옷을 벗어놓았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다마스쿠스로 그리스도교인을 잡으러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사흘간 앞을 보지 못하고 환시를 통해 그리스도교인으로 회심, 지금까지의 마음을 돌리게 된다. 이것을 바오로의 회심 사건이라 부른다.


1955년 고종 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가회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게 된다. 의친왕비 김숙도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의친왕은 세례를 받고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났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는 천주교 신부를 청해 영세받기를 원했다. 그는 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 최근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 후 날로 천주교 세력이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였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하는데, 그가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시내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영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친왕의 영결미사는 20일 오전 10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거행되었다.(1955년 8월 18일, 경향신문)"



● 석정보름우물


북촌 마을의 음수원이었던 우물로 15일은 맑고 15일은 탁해져서 보름 우물이라 불렸다고 한다.

중국에서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 활동할 때 이 우물의 물을 세례수로 사용했다고 하며, 김대건 신부도 이 물을 성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면서 순교자가 늘어가자 이 우물물의 맛이 쓰게 변하여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북촌 길에서 중앙고등학교로 올라가는 길 옆에 위치해 있다.




● 경기감영 터

서대문 밖에 위치했던 경기감영의 터로 서대문 역 4번 출구 옆에 표지석이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최창주, 이중배, 원경도, 권상문, 홍인 등 경기 지역에서 신앙 공동체 활동을 하던 신자들이 고문과 형벌을 받던 곳이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던 조용삼은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았는데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배교를 강요하자 신앙고백을 남기고 결국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조용삼 베드로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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