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대성당-김범우의 집 터
지난여름 폭염으로 온 나라가 타오르던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부터 서울순례길 '9월愛'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명동성당은 수도 없이 다녀왔지만 대성당과 코스트홀 외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순례길을 계획하면서 알게 된 역사관을 들러보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에서 순례자 키트를 구입하고 스탬프도 찍을 수 있었다. 명동성당 역사관은 월요일에 휴관하기 때문에 8월 17일 화요일 나의 순례길 첫 발을 딛게 되었다.
명동성당은 여러모로 상징성이 크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민주화 운동의 보루였던 곳, 약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이끌었던 곳이었고 종교를 불문하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진정한 어른으로 버티어주셨던 곳이다.
명동성당에 대해서는 오며 가며 한 두 줄 읽었던 설명이나 주워들은 이야기들이 아는 것의 전부였고 '명동' 하면 당연히 '성당'이 따라오는 명동의 상징, 민주화의 상징, 서울의 상징이었다. 서울순례길을 걸으며 비로소 소개 리플릿도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 조선 후기 역사 위에 한국 천주교를 올려놓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도 명동성당 역사의 끄트머리 아주 작은 단상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나라 천주교의 출발지였고 최초의 본당이었으며 100년 넘는 박해를 견디고 결집된 신앙의 기둥을 세운 곳 명동성당은 내가 세상에 휩쓸릴 때마다 그 안에 깃든 기도와 의미로 나를 다시 일으키도록 저 높고 뾰족한 곳에 세워진 구리뱀일지도 모르겠다. (참조 민수기 21,4-9)
20여 년 전 천주교 세례를 받으면서 서울에 위치한 성지를 하루 동안 투어 하는 일정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때 명동성당에 대해 들었던 설명 중에 지금까지도 가슴 한쪽에 남아있는 이야기가 있다. 명동성당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데 이 건물을 지을 당시 한강 서북면 그러니까 이촌동 즈음 녁부터 마포 방향으로 이어지는 강변에는 기와나 벽돌을 찍어 구워내는 곳이 성했다고 한다. 용산 강변의 새남터와 절두산, 당고개 등에서 순교가 이루어졌고 순교자의 피는 강물을 물들였다고 하니 땅 속으로 스며든 순교자의 피를 담은 흙으로 벽돌을 구워 쌓아 올린 것이 명동성당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후로 명동성당은 순교자들의 피로 쌓아 올려진 나만의 성전이 되었고 더욱 특별한 신앙의 장소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고 보수되어 세월의 덧칠이 이루어졌다 해도 명동성당의 붉은 벽돌은 여전히 나에게는 순교자의 기도 그것일 뿐이다. 세례 전 촉박한 일정 속에서 설명을 들으며 '무엇이 그들의 두려움을 이겼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이어졌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나의 신앙을 지켜가는 질문인지 모르겠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세상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1784년 우리나라 최초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모임을 시작하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출발하게 된다. 이보다 먼저 1777년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천주학을 접하고 이들이 함께 모여 강학회를 개최하고 1780년에는 천진암에서 권철신을 중심으로 저명한 소장학자들이 천주학을 접하게 되고 강학회를 이끌어왔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가 입교하게 되고 그의 집에서 교회예절과 교리강좌 등 종교집회를 이어가게 되는데 1785년 형조에 발각되어 김범우는 경상도로 유배를 가게 되고 이 모임은 해체된다. 명례방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의 하나로 지금 명동 근처를 아우르는 지역이었고, 이곳에서 초기 교회가 태동되어 후에 블랑 주교는 명동성당의 터를 이곳에 세우게 된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노론파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다. 1801년부터 4번의 커다란 박해사건이 있었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끝날 때까지 박해는 이어졌다. 서구 열강들의 개방 요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었고 1882년 한미수호조약,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비로소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다음 해 1887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블랑 주교는 명례방 언덕 위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 대지를 구입해서 성전 건축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명동성당의 설계와 공사 지휘는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명동뿐만 아니라 약현성당, 용산신학교의 설계와 감독도 맡았다. 지금도 남아있는 이 세 군데의 성당을 비교해 보면 코스트 신부의 성전 대, 중, 소 버전으로 보이는데 모두 그 안에 담긴 기도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코스트 신부는 1896년 선종하고 1898년 성령강림대축일에 성전 봉헌식을 갖게 되었다. 마치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눈앞에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것 같이 코스트 신부도 완공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명동성당 옆 성물가게가 있는 건물은 '문화관 코스트홀'로 이름 짓고 코스트 신부를 기리고 있다.
이렇게 1898년은 명동성당의 원년이 되었고 2014년 서울대교구는 '1898'을 로고 화해서 교구청 지하에 1898 광장을 만들고 브랜드화하기도 했다. 1898 광장에는 맛있는 빵집도 있고 향기로운 커피집도 있고 무엇보다 1898 로고샵은 명동성당에 갈 때마다 방앗간처럼 거르지 않고 뭐라도 하나 들고 나오게 하는 묘하게 아름다운 곳이다.
사실 명동성당을 그리 다녔지만 막상 성당 주변을 다 돌아도 사도회관을 찾을 수 없었다. 곁에 지나가시던 수녀님께 어렵게 여쭈어보니,
"찾기 힘들죠? 나도 찾기 어려웠어요."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사도회관 건물 앞까지 동행해주셨다.
성당에 오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을 기대하는데 마치 본가에 온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찾아간 사도회관은 명동성당 입구 주차봉 언덕 아래 파밀리아 채플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동글동글 예수님이 팔 벌려 맞아주시는 곳. 명동성당에서 대성당보다 8년 먼저 지어진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890년에 지어진 사도회관은 벽돌과 나무 서까래의 구조를 그대로 볼 수 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주교 숙소로 출판사로 식당으로 주교관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서울대교구의 역사를 모두 모아 상설전시로 공개하고 있다.
1층과 2층에 서울대교구의 역사와 함께 한국 천주교의 역사, 명동성당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는데 2층에는 옛 주교관 시절 남쪽으로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속에 의자들을 놓아두어 저곳에서 휴식 중이신 노기남 주교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었다. 2층에서는 정진석 추기경님 선종 1주기 추모 특별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열리고 있었다.
사도회관에서 2시간 가까운 시간을 머물렀는데 나를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게 한 것은 역사나 정보가 아니라 건물의 용도가 바뀌면서 들고 났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머물고 거처했던 공간. 지금 2022년에 내가 그 공간 안에 서있다.
봉사자의 설명에 의하면 긴 역사를 거치면서 원형 유지의 가치도 몰랐을 시절 건물을 보수하기 위해 시멘트를 바르기도 하고 오히려 원형을 훼손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도 역사이기에 마지막 리뉴얼 작업에서는 시멘트 흔적도 남기고 원형을 지키고자 했다고 한다.
중앙 통로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위치에서 빛이 들어오는 출입문을 향해 서서 한동안 머물렀다.
천정을 보니 빛바랜 붉은 벽돌, 시멘트 흔적, 나무 서까래 같은 버팀목들... 잠시 눈을 감고 1890년을 상상해보면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기도소리,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 전화 벨소리...
사도회관 출입구 맞은편에는 사방의 건물들 사이로 우물 정(井) 자 형태의 작은 마당이 나오는데 명동 개발과정에서 발견된 옛 건물지 유적 현장으로 아궁이와 온돌의 형태들을 볼 수 있도록 보존하고 있다.
때로 감정선이 흔들릴 만큼 화가 나거나 속상하거나 마음이 산란할 때 나는 그냥 밖으로 나가서 걷는다. 어느 책에선가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서는 일단 그 장소를 떠나 무조건 걷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감정의 격정이 몰아치면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했는데 나에게는 꽤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종로 한복판을 뱅글뱅글 돌기도 했고 한강 지류의 어느 둑길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가슴이 답답하면, 폭발할 것 같으면, 돌아버릴 것 같으면 걷고 또 걸었다.
서울순례길의 시작도 그와 같았다. 계획에 없던 퇴사로 인해 갑자기 주어진 시간은 어둡고 해로운 것들만 복기하고 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힘듦에 직면하게 되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생각 구조는 쏜살같이 원망의 대상을 찾아 미움을 쏟아붓고 이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자책감과 실망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다가 마지막에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더 깊은 어둠에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점점 마음의 기운을 잃어갈 즈음 나에게는 밖으로 나가 걸어야 할 조건이 마련된 셈이었고 마침 순교자성월이 시작되어 서울순례길 첫 길에서 그 어둠을 끊어내기 위해 고백성사를 보게 되었다.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으리라 마음먹고 들어간 고해실에서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는 있는 힘을 다해 방어막을 치고 있던 온몸에서 힘이 빠지더니 그만 눈물 콧물 다 쏟으며 펑펑 울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극단의 생각을 할 때에도 하느님은 자매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고해실을 나와 한동안 멍하니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눈물이 마르자 오랜만에 배가 고팠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일어서고 있었고 이번에도 나는 좋은 몫을 택한 것 같았다. 매번 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사도회관 벽의 시멘트 자국처럼 어둠 속의 나도 돌보고 기억해야 할 나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