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대신
나는 서울순례길을 걷는다

회사를 나와 길 위에 서다

by minsan민산


드디어 10번째 회사를 그만두었다.


386이라 부르던 한창때를 지나 486, 586으로 불리며 여전히 현장에서 일해왔던 나는 임원이 되어야 할 나이에도 팀 소속이고 멤버였다. 내 인생의 수많은 리셋을 거치면서 좋게 말하면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그 짜릿한 성취감이 나를 단련시켰는지 모른다.


라떼의 변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격변의 시대를 겪으며 살아내고 또 살아남았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세상에 적응해야 했고 남자와 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평등할 수 없었으며 IMF와 같은 굵직한 위기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저항하는 법을 배웠고 그렇게 이루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부딪히며 내 무릎이 꺾일 때마다 나는 리셋으로 다시 일어섰고 새로운 자리에서 또 열심히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전통문화 계간지 기자, 공연예술 전문 월간지 기자, 출판사 편집부장, 사보 사외보 편집장, 카피라이터, 광고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광고회사 출판사 대표, 수입오퍼, 오픈마켓, 고객상담사, CS교육강사, 홍보, 조직문화, 마케터... 참으로 버라이어티 한 커리어가 되었다.


내 아이들 또래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내 나이와 경험은 훌륭한 장점이기도 했고 필요에 따라 단점이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달라지는 것은 나잇값의 크기였고 업무에 대해서도 기대감보다는 증명해 보여야 하는 위치가 되어갔다.


무엇보다 가장 무거웠던 것은 자기 효능감이었다. 보통 정도의 기준을 5라고 한다면 나는 7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업무성과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예민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더욱이 업무와 관련된 피드백이 아니라 조직 내의 정치나 감정 어택에 노출되면 내 나이가 무색하게 내상은 깊고 크기만 했다. 뭐, 어쩌겠는가. 완벽한 'I'의 성향을 지닌 내가 겪어내야 하는 숙제일 뿐.


그러나 나에게도 내가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고 또 스스로 부여한 업무 수행 기준만큼 나의 임계치는 나의 최종 보루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정년퇴직을 2년 앞두고 10번째 회사를 그만두었고 잎싹이 처럼 마당을 나온 암탉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맹수가 우글거리는 들판에서 마당으로 들어온지도 모르겠다.



꿈이 하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늦둥이 둘째 아이 출산 전후의 경력단절을 제외하면 쉼 없이 일해온 내가 정년퇴직으로 은퇴하게 되는 날 선물을 주고 싶었다. 긴 세월 수고했어. 애썼다 하며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회의도 없고 협업해야 하는 동료도 없고 돌보아야 하는 가족도 없이 내일에 대한 걱정도 없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빈둥빈둥하며 사색하는 시간.


산티아고를 걷고 싶었다.

유튜브와 SNS의 수많은 피드들을 보면서 꿈을 키웠고 차곡차곡 정보들을 모아갔다. 내가 내키는 대로 일정을 정하고, 보고할 필요 없이, 다른 사람의 취향 배려 없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걷고 싶을 때 걷는… 무엇보다 목표 없는 생각을 하고 싶었고 성과를 걱정할 필요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야고보 성인의 길 위에서 돌아보고 정리하며 어떻게 늙어갈까 노년을 준비하는 Gapyear의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는 것쯤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변수의 상황에서 우리는 성장해왔고 진한 성취감을 축적해왔는지 모른다. 때로는 순조로운 진행이 영 불편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마치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듯 안심하고 신나 하는 동안 계획이 깨지거나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미리미리 불행의 백신을 맞는 것처럼 신속한 대응안과 방어기제는 자동으로 작동되었다. 그래야 건너갈 수 있었고 해결할 수 있었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역시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정년을 2년 남기고 사직서를 던지고 회사를 나와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두 번의 창업과 폐업 그리고 여덟 곳의 회사. 그 마지막 열 번째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실 마지막 회사는 일주일 모자란 일 년 동안 일한 곳이어서 정이 깊어질 연차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퇴사 결정은 힘들고 어려웠다. 현업에서의 정년퇴직은 저만치 멀리서 안녕을 고하는 듯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복병은 고3 수험생 아들이다. 엄마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대학 입시가 코 앞에 닥친 아들에게 “엄마에게 사색의 시간이 필요해.” 하며 긴 시간 집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엄마의 응원이 얼마나 필요한지 엄마 없이 자란 이 엄마는 잘 알고 있기에 졸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이를 맞아주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꽤 많은 생각에 시달렸다.

언제나 가장 어렵고 가장 아픈 것은 업무가 아니라 관계이지만 이 관계를 대하는 내 감정은 나이가 들면서 무디어지기는 커녕 더욱 명확한 기준을 쌓아가고 있었다. 내 감정의 벽은 점점 탄력을 잃어 얇아지고 있는데 더 많은 이해심과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지금 나의 이 불편한 마음은 무엇인지 이런저런 심리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 정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책으로 배우는 자기 이해.


이제 내 감정에 대한 기대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적응해 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끊임없이. 다만 이제 내 안에서 나와 화해하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또 다른 리셋을 위하여.


그즈음 가톨릭 전례에서 매년 순교자성월로 지내는 9월이 다가왔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진행하는 ‘9월愛 동행’ 순례 프로그램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저 멀리 스페인의 산골에서 야고보 성인의 길을 걷고 싶었지만 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를 초대하는 것처럼, 우연히 서울순례길을 알게 되어 바로 순교자성월에 커다란 생각 주머니를 이고서 그 길 위에 설 수 있었다.


심지어 집에서 출발하고 집으로 귀환하는 나의 순례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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