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올라오면 문화와 젊음의 거리 대학로가 펼쳐진다. 그 길을 따라 걷다가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삼선교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혜화동 성당을 지나 언덕 위 낙산 줄기 끝에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학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가톨릭 사제를 양성하는 못자리. 대학로 거리를 채우고 있는 젊음과 똑같은 젊음이 이곳을 채우고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이곳은 방학기간 중에만 성당 방문이 가능했는데 내가 찾은 때에는 코로나로 인해 그마저 중단되었다는 안내를 받았다. 아쉽지만 대학 입구에서 푸르른 녹음 뒤의 신학교를 바라보면서 신학생들을 위한 기도를 마치고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나라 가톨릭 신학교는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충북 제천의 교우 장 주기 요셉의 집에 설립한 '성 요셉 신학교'가 시초이다.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하시고 1849년 상해에서 신품성사를 받은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전국 구석구석의 신자들을 찾아 사목활동을 펼치고 계실 때였다.
초대 교장으로 푸르티에 신부가 취임하여 10여 명의 신학생을 교육시켰는데 라틴어와 철학, 신학 등의 학문을 배우며 사제 양성을 이루어갈 즈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두 신부님은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장 주기 요셉은 갈매못에서 순교하여 요셉신학교는 폐쇄되었다.
그 후 1885년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 신학교가 다시 개교되었다가 한불통상수호조약 체결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순교지였던 새남터 인근 용산에 터를 잡아 1887년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옮기게 되었다.
1929년 예수성심신학교를 대신학교와 소신학교로 구분하여 현재의 동성고등학교 자리로 소신학교를 옮기게 된다. 이후 1945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혜화동의 베네딕토회 백동수도원 부지와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 부지를 교환하여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대학로 끝 언덕 위에 위치한 신학교 담을 사이에 두고 밖에서는 예술가들과 젊은 대학생들의 자유를 향한 고민, 미래에 대한 고민과 젊음의 흥이 넘치고 있을 때 안에서는 신학과 영성을 배우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또 다른 젊음의 흥이 넘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또래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더 채울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이곳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더 비워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신학교는 7년의 교육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학부 4년과 대학원 과정 3년, 학부 2학년을 마치고 전 학년이 군입대를 하게 되며, 2년의 군 복무를 마치면 복학 전 1년 동안 해외 혹은 국내에서 사목 실습과 봉사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꼬박 10년의 시간이 걸리고 20대를 고스란히 교육과 수련의 시간으로 보내고서야 한 명의 신부로 사목에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학생의 생활은 여느 대학생과는 사뭇 다르다. 학교 밖 외출도 자유롭지 않으며 매일 새벽 넥타이와 정복을 갖추고 기도로 시작해서 저녁에는 대침묵 속에 각자의 방에서 기도하고 공부하며 일과를 마친다. 20대 10년 동안...
그러나 더러 만난 적이 있던 신학생들은 더없이 밝고 그리 환할 수 없었다. 영혼의 기쁨이 저런 것일까 싶었다. 그렇게 10년 동안 어울리며 부대끼고 살다 보면 바로 그들이 형제요, 내 가족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신학교 성당에는 사제들의 주보성인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0여 년 전 특별한 기회에 이곳 신학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다. 세상 속에 있는 세상 밖의 고요. 이 좋은 곳에 우리 아이도 살게 되면 참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 후 다시 그곳에서 부모의 자격으로 직수여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게도 대학로 혜화동은 20대의 꿈과 좌절 하나를 두고 온 곳이다.
대학시절 학회 희곡부에서 번역 작품을 연극무대로 만들게 되었는데 외부 연출가를 모셔와 배우로 무대에 서게 되면서 연극을 하지 못하면 곧 쓰러질 것처럼 그만 뜨겁게 빠지고 말았다. 가족들의 반대가 심할수록
내 꿈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해졌고 졸업 후 공동창작 팀에 들어가서 작품을 준비하게 되었다. 시간을 쪼개가며 아르바이트도 하고 발레를 배우고 한국무용을 배우고 판소리를 배우고 사물놀이를 배우고... 연극, 무용, 그림 전시회, 음악회, 영화 등, 보고 느껴야 할 것도 많았다. 밤을 새워도 피곤한 줄 몰랐고 돈이 없어도 기죽을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배우고 채워야 할 것들은 많은데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던 용수철처럼 통통 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공동창작 작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토론은 진행되지 못했고 의견이 다르면 나쁜 배우가 되어버리는 구조, 거기에 반론을 말하려 하면 온갖 원색적 비난이 쏟아지는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타올랐던 나의 열정은 그만큼 빠르게 식어갔다. 하기야 1980년대 후반의 사정이니 모든 분야가 그리 합리적이지는 못했을 텐데 그래도 연극만큼은 사고와 표현의 경계가 열려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팀을 나와 전통문화를 다루는 계간지를 거쳐 연극 월간지에서 기자로 일하게 되었고 또 다른 분야에서 연극과 문화의 언저리에 머물렀다. 계간지나 월간지처럼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간행물의 경우 보통 1년 단위의 편집기획안을 세워놓고 매월 특집기사 또는 그때그때의 이슈를 다루는 내용을 채우게 되는데 1년 정도의 한 사이클을 경험하고 나면 업무에 대한 긴장감이 많이 줄어들곤 한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고 20대 후반이 되면서 지금 나는 지속 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연극 전문지의 기자인데 나는 연극 전문가가 아니었고, 기자인데 전문 저널리스트의 방향성도 아니었다. 3년 뒤, 5년 뒤 나는 이곳에서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그려지는 모습이 없었다.
깊은 고민과 방황 끝에 결국 회사를 나왔고 연극을 떠났다. 이후 광고회사의 사보 편집자로 일하게 되면서 카피라이터, 광고기획으로 나의 커리어를 넓혀갈 수 있었고 연극을 하겠다며 배우고 익힌 나의 문화적 소양들은 누구도 가지지 못한 나만의 강점이 되었으니 20대의 좌절과 방황은 괴로워도 귀하고 쓰러져도 귀한 시간임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나는 20대의 꿈 하나를 대학로에 두고 90년대의 커리어우먼을 향해 점점 워커홀릭이 되어갔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여기 대학로 혜화동 신학교 앞에 서있다.
꾸역꾸역 채우기 바빴던 나의 20대와 안 보이는 것도 찾아서 비워내야 했던 아들의 20대가 묘하게 오버랩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