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을 설계했던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감리를 맡아 1892년 완공한 예수성심신학교 성당과 학교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학교 안에는 성심수녀회도 함께 있어서 평일에는 일반인의 방문이 제한되고 토요일과 일요일만 일반 순례객 방문이 허락되는데 조용한 교정을 걷다 보면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1892년 지어진 소신학교 건물은 1960년대에 철거되어 남아있지 않고 1902년에 지어진 성당과 1911년 이후 지어진 대신학교 건물은 성심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세월의 묵직함이 느껴지는 성당 건물은 벽돌 하나하나에 기도가 서린 듯했다. 네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신자석. 내부는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작고 아늑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루 바닥 위를 지나 저절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게 하는 그런 곳이었다. 100년 전 신학생들은 새벽기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잡고 기도하고 성가를 불렀을 테지. 정복을 입은 신학생들이 분주히 오고 갔을 이곳 신학교 성당. 마룻바닥이며 벽돌과 천장 모든 곳에서 기도소리,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를 기억하고 있겠지.
언젠가 강화도 산 속에 위치한 신학교에서 새벽 주일미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미사 시작 전 성전 안에서는 신학생들의 성무일도 아침 기도가 성가로 진행 중이었고 미사를 기다리는 동안 밖으로 울려 퍼지는 청년들의 기도소리는 천상의 소리가 이런 것인가 싶었다.
매일매일 20대의 모든 날들을 새벽기도로 시작하는 젊음들... 미사가 끝나고 환한 웃음과 장난기로 우르르 몰려가던 신학생들은 여느 20대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그날의 기도소리는 잊히지 않는다.
조선에서 신학생 교육을 위해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북 제천의 '성 요셉 신학교'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고 1885년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이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조선에 진출해있던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에서 온 두 분의 주교와 여덟 분의 신부 외에 김대건 신부와 많은 평신도들이 처형되었던 새남터가 내려다 보이고 당고개 순교지가 건너 보이는 용산 함벽정 일대의 땅을 매입해서 1887년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옮겨 예수성심신학교를 열게 되었다.
1945년 혜화동으로 신학교를 이전하고 현재는 성심수녀회와 성심여중고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다. 예수성심성당은 붉은색과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고딕풍 외관을 갖고 있으며 사적 제521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