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 순교성지 - 노고산 성지 - 삼성산 성지
가만히 돌이켜보면 나는 어지간히도 말 안 듣는 딸이었고 타협할 줄 모르는 사회인이었다. 내 인생을 아버지가 대신 살아주시는 거 아니니 아버지 선택대로 살지 않겠다는 폭탄을 던지고 묵직한 아버지 손에 얻어맞으며 장렬하게 사회로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니 내 인생에 대한 독립선언은 폭탄이었고 아버지의 매는 당연한 값이라 여겼다. 순탄하고 빠른 길 대신 언제나 불안하고 돌아가는 길을 걸어왔다.
고등학교 시절 무조건 이과를 가야 한다는 가족들 몰래 아버지 도장을 슬쩍 찍어서 문과로 갔고, 학교와 집에서는 적성과는 관계없이 더 좋은 대학으로 진학하는 줄 알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면접 당일에 적성을 택해 그들의 바람과는 다른 학교의 면접장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80년대 초 입시제도가 그랬다. 두 개 대학에 지원하고 한 학교의 면접에 출석하는 방식이었다.)
광고회사에 입문했던 첫 회사에서는 업무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개선될 여지가 없어 이직을 결정했을 때 대표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저 직원이 우리 회사에서 계속 일할만 한지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처럼 직원도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할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직을 결정했습니다."
참으로 쉽지 않았다. 건드리면 바로 날이 서는 그런 아이였다. 바로 현재의 모습을 결과로 평가하는 이들에게는 철없고 어리석었을 테고 내가 걸어온 과정을 보아 알고 응원하는 이들에게는 주관 있는 별난 아이였을 테다. 지금까지 10개의 회사를 지나온 이력에는 아마도 이러한 내가 고스란히 녹아있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내가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어려운 말이 '순명'이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로 '하늘의 명에 순응해야 함'을 뜻한다.
가톨릭에서 복음적 권고의 하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명령에 따르는 덕을 뜻한다.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교황과 소속 직권자에게 존경과 순명을 표시할 의무가 있다. (천주교 용어자료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실 성당에 다니게 되면 온갖 축복이 나에게 쏟아질 것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이루었던 모든 것은 내리막을 걷게 되었고 스테이지가 올라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게임처럼 시련의 강도는 점점 더해만 갔다. 내가 좌절하고 울고 있을 때 내 손을 잡아주신 수녀님이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자매님을 엄청 사랑하시나 봐요.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에 순명하세요."
사랑도 순명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그런 사랑은 안 해주시면 좋겠어요." 하면서도 빈 성당에서 저기 하늘에 계신 분께 따지기도 하고 화도 내고 울기도 하면서 나는 성당을 떠나지 않았었다. 긴 세월 실패와 시련에 대한 화가 내 힘을 모두 소진시키고 난 뒤에야 실패도 시련도 나의 중요한 한 부분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게 순명이라는 건가.
서울순례길을 걸으며 많은 순교 성인들을 만났다. 각기 다른 날 다른 일정으로 찾아간 곳에서는 프랑스에서 오신 세 분의 순교 사제를 기리고 있었고 이분들의 순명 이야기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더욱이 이 세 곳의 성지는 순교로 죽음을 맞은 이후 목숨을 걸고 이장하며 지키고자 했던 신자들의 보살핌이 스며있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에 입국한 첫 번째 주교였던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는 조선에 들어와 지방을 순회하며 성사를 집전하며 신자들을 돌보았고 교회를 위해 일할 적임자를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교육하여 교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을 선발해서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1839년 박해가 심해지자 배교하는 신자가 많아졌고 그들의 밀고로 외국인 신부의 활동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분들을 잡기 위해 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자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의 희생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 나아가 잡히게 된다.
이때 주교는 샤스탕 신부에게 자수하여 함께 순교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고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주교님의 뜻에 순명하고 자수하였다. 1839년 세 분의 신부님은 고문 끝에 군문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아베마리아'로 익숙한 작곡가 구노는 앵베르 주교의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친구의 순교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잠긴 구노는 친구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여 봉헌했고 이 곡은 가톨릭 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이다.
한강변 처형터인 새남터 모래사장에 20여 일간 방치되었던 세 분의 시신은 늦은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찾아온 박 바오로와 신자들에 의해 신촌 노고산에 묻힌다. 그 후 이곳마저 발각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그로부터 4년 뒤인 1843년 다시 박 바오로의 선산이 있던 삼성산 깊은 곳으로 옮겨 이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58년 후 1901년 세 성직자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학교를 거쳐 명동 대성당 지하 성지 묘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나아간 주교, 주교의 순교 명령에 순명한 젊은 사제들과 그 시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분들의 시신을 지키고자 했던 신자들의 순명이 오래도록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삼성산 그 깊은 계곡 속 숨죽이며 성인들을 모셨을 옛 신자들의 발소리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많은 장애를 뚫고 우리를 이 포교지까지 인도하여 주신 천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던 평화가 가혹한 박해로 혼란된 것을 하락하셨습니다.... 오늘 9월 6일 우리에게 순교하러 나오라는 주교님의 두 번째 명령이 왔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나서 떠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나에게는 영광으로 가는 길이 하나뿐이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원하노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1839년 9월 6일 성 모방 신부님이 남긴 편지 중에서).
노량진에서 용산으로 향하는 한강철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에 한옥 기와지붕으로 높게 서 있는 곳이 새남터 순교성지이다. 이곳은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이었고 중죄인의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순교하신 곳이고 프랑스에서 오신 두 분의 주교님과 여덟 분의 신부님, 우리나라 평신도 세 분(성 현석문 가롤로, 성 정의배 마르코, 성 우세영 알렉시오)이 순교하신 곳이다.
웅장한 한옥의 형태로 꾸며진 성전 안에는 이곳에서 순교하신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성지 기념관에는 4대 박해의 역사와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있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외에 다른 곳에서 순교하신 다섯 분의 유해도 모셔져 있다.
새남터 순교성지는 매일 순례자를 위한 성지 미사가 이어질 만큼 순례자의 기도가 멈추지 않는 곳이다.
노고산은 박해 때에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곳이다. 현재 노고산 일대는 순교자들의 땅 위에 부지를 마련하여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가 있다. 한 달에 한번 매월 첫 목요일에 성지 미사와 성체 현시가 진행되는데 참석자 수가 많지 않아 더욱 고요히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곳이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 유해는 노고산에서 4년 만에 다시 옮겨 이곳 삼성산에 묻히게 된다. 지금은 근처에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큰 도로가 입구까지 연결되지만 그때에는 아마도 깊은 산중이었을 텐데, 잘 닦인 도로변에서 올라가는 지금도 숨이 차오르는 길이었다.
옛 신자들이 지키고자 했던 세 분의 유해는 바로 세 분의 순명을 섬기어 모시는 신자들의 순명이 아니었을까.
삼성산 성지에서는 매월 21일에 성지미사가 거행되는데 마침 내가 방문했던 9월 21일이 세 분의 순교 일이었다. 세 분 성인들과 그분들 곁에서 묵묵히 순명하던 이름 없는 신자들을 생각하며 한참을 머물렀다.
'과연 나는 순명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