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성지
지하철 2호선 당산 철교를 건너 합정역으로 향하는 한강변 우뚝 솟은 봉우리 위에 절두산 순교성지가 있다. 봉우리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들어 올린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이라고 불리던 이곳은 수많은 피의 순교가 이루어졌던 가장 잘 알려진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합정역에서 성지를 향해 걷다 보면 절두산 봉우리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만난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한 계단 한 계단 우리가 가야 하는 하늘을 향한 방향 표시 같았다. 꺾인 화살표처럼 가리키고 있는 저 높은 곳에 다다르면 절두산 순교성지가 펼쳐진다. 나무와 꽃과 고요한 바람 소리와 함께.
중국을 왕래하며 서학에 능했던 남종상 등 천주교인들은 프랑스를 통해 러시아의 남하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제안했고 대원군은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선교사의 중재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고수했고 프랑스와의 접촉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오랜 기간 천주교를 박해해 오던 조선에서 대원군이 천주교인을 통해 프랑스와 접촉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서 대원군은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1866년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와 세 분의 신부가, 갈매못에서는 다블뤼 주교와 두 분의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수많은 평신도들이 처형되었다.
일곱 분의 프랑스 성직자가 처형되자 프랑스 함대가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까지 올라왔다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프랑스 함대가 거쳐간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하게 된다. 병인박해는 대원군이 실각한 1871년까지 계속되며 이 기간 동안 약 8천여 명의 신자가 처형되었다고 한다.
한강변 양화진의 봉우리 위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참수되어 강물에 던져졌고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한강물이 붉게 물들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누에의 머리 모양을 닮아 불리던 '잠두봉'은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서 1966년 이곳에 성당과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고 절두산 순교성지로 조성하고 성지 일대는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사적 399호)'으로 지정되었다.
울창한 나무와 조경으로 잘 가꾸어진 절두산 순교성지는 곳곳에 조형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곳이다. 순교자들의 유품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매일 '지속적인 성체 현시와 성체강복'도 진행되고 있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 조용히 절두산에 올라 하늘을 보며 바람 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으면서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우리는 가끔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세례를 준비하면서 처음 절두산 성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곳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꽤 깊은 잔상을 남겼다. 이름 없는 순교자 무덤에서 출토된 녹슨 묵주와 십자가들은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건네주고 있었다.
절두산에서 새남터에서 전국 방방곡곡 깊은 산속에서 수만의 신자들은 배교를 거부하며 순교를 택했고 시퍼런 칼날 앞에 의연히 신념을 지키며 스러져갔다. 한강물이 붉게 물들어 흐르는 동안, 나의 순교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신자들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고 기꺼이 기쁘게 순교의 길을 따랐을 우리나라 선조들. 천주교 순교자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세례 받기를 청했던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의 이야기가 슬프고도 긴 대서사의 결말이 되는 것 같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세상의 고통과 시련이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어제밤 젊은 청춘들이 안타깝게 스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젊음들과 가슴을 치고 있을 남겨진 가족과 친지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