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묻힌 곳에서
교회의 벽돌을 굽다

왜고개 성지

by minsan민산


코로나에 걸렸다. 회사 내에 한바탕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갈 때에도 굳건히 살아남았고 가족들이 모두 확진되었어도 잘 버티고 있었다. 4차 백신이 오픈되자마자 잔여백신을 검색해서 일찌감치 내 몸은 챙기고 있었다. 만난 사람도 없었고 혼자서 서울순례길을 걸은 것이 전부인데 하여튼 드디어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추석 연휴 전에 격리가 끝나니 가족들과 한 밥상에 앉을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침이 심해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다시 순례길에 나섰다.


용산은 많이 변해 있었다. 특별한 연고가 없어서 지하철을 타고 스치는 것 외에 용산 거리를 걸어본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노량진에 살았던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회사가 용산이었고 엄마와 가끔 용산시장으로 과일장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 용산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용산역에서 삼각지역 방향으로 천천히 걸으며 예전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신도시가 되어있었다.


용산 우체국 뒤로 조금 더 들어가면 왜고개성지가 나온다.

한자로 와현(瓦峴),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렸으며 오래전부터 이곳의 흙이 좋아 기와와 벽돌을 구워서 공급한 와서가 있던 곳이었다.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지을 때 이곳에서 만든 벽돌을 사용했다고 하니 순교자들의 얼이 그곳에서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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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846년 병오박해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던 곳이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베르뇌 주교와 다섯 분의 프랑스 신부, 평신도 성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이 1899년 뮈텔 주교가 발굴하여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장되기까지 33년 동안 묻혀있던 곳이다.

또한 병인박해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평신도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두 분 역시 1909년 뮈텔 주교가 발굴하여 명동성당으로 모시기까지 43년 동안 묻혔던 곳이다.


서울순례길 성지 중에는 왜고개 성지처럼 순교 성인들의 시신이 머물다 가신 곳이 있다. 노고산성지, 삼성산성지도 그러한데 천주교 신자라면 잡아가던 박해시기에 참수형에 처했던 순교자들 시신을 수습하여 모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지를 순례하며 자료들을 찾다 보니 목숨을 걸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보다 안전한 곳으로 그분들을 지켰던 평신도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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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바오로와 그의 아들 박순집 베드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1839년 기해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새남터에서 노고산으로 노고산에서 삼성산으로, 새남터에서 왜고개로 순교성인들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고 모시며 지켜냈다.


박 바오로는 기해박해에 순교하여 한강변 모래밭에 버려져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를 찾아 20여 일 만에 수습하고 교우들과 함께 감시의 눈을 피해서 노고산에 매장한다. 그리고 발각될 것을 염려해서 4년 뒤 그의 선산인 삼성산으로 세 분의 시신을 이장하고 그의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알려준다.


박순집 베드로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순교성인을 돌보게 되는데 병인박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6분의 프랑스 신부와 교우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을 찾아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찾아내어 왜고개에 모셨다.


박해의 시기가 지나고 제7대 교구장으로 온 블랑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박순집 베드로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곳과 보고 들은 것들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게 된다.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된 총 3권의 '박순집 증언록'은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그 중심에는 평신도가 있었다. 순교성인들의 담대한 순명도 평신도들의 목숨을 건 순명도 그저 그 앞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1981년 이곳에 육군 중앙성당을 짓고 1989년 군종교구가 설립되었다. 이곳은 국군 중앙 주교좌성당으로 군 사목의 중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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