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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장인 모 기자 May 18. 2021

스포츠부 강 기자의 '슈킹'

강 기자는 오전부터 아쉬운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점심 식사 약속을 한 야구단 홍보팀장이 그 상대였다.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기사거리를 찾으려는 취재 전화가 아니었다. 새로 부임한 스포츠부장의 지시 아닌 지시 때문이었다. 


신임 부장은 기업들을 상대하는 산업부에서 20년 넘게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본인은 경제부나 산업부장을 거쳐 부본부장과 본부장까지 승진하길 바라고 있었지만 윗선의 생각은 달랐다. 돈 벌어오는 재주만큼의 인덕은 없던 탓이었다. 그런 인물에게 주요 보직 부장을 맡겼다가 탈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요즘은 사소한 일 하나로도 이런저런 직장인 플랫폼에 올라가서 신나게 씹히고 포털에 기사까지 나는 시대라고 경영진은 우려했다. 신임 부장은 경영진의 결정에 반발해 사표를 내고 사흘간 두문불출했었고, 결국 모종의 약속과 함께 스포츠부로 출근하자마자 이렇게 혼잣말을 해댄 것이었다.


"부장이 새로 왔는데, 어떻게 밥 먹자는 인간이 하나도 없어. 정말 스포츠판도 예전 같지 않구먼. 정이 없어, 정이! 평소에 취재원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이후 각 종목 팀장들은 경쟁적으로 식사 약속을 잡으라고 후배 기자들에게 지시를 했고, 식사 약속이 잡히면 부장은 구단을 운영하는 모(母) 기업 성격을 고려해,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짧고도 명확하게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통신사가 운영하는 야구단 홍보 임원과 약속을 잡은 강 기자에게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 왜 손으로 하는 거 있잖아, 무슨 패드 이런 거. 그런 건 거기서 얼마에 파나?"


그래서 강 기자는 상대에게 부장의 의중을 정확하게 전달했다. '민원은 서로 고민하지 않게 명쾌해야 한다'는 평소 생각대로.


"저희 부장이 태블릿 PC를 원하시더라고요.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네, 그럼 부탁드려요."


이런 강기자의 노력 덕에 일식집에서 구단 홍보 임원과 마주 앉은 신임 부장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이미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몇 잔 마신 데다가, 적당히 취기가 오른 타이밍에 야구 모자와 태블릿 PC까지 차례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부장은 계속 돌아가는 술잔들 속에서 공수표를 마구 날려댔다.


"올해에는 우승하실 수 있게, 많이 도와드리자고"

"어휴, 저희 올해 전력이 플레이오프도 힘들 지경입니다."

"으잉? 그러면 안 되지. 저희 후배들이 사기 팍팍 올려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 이봐, 시즌 전에 여기 감독님하고 스타 두 어 명 인터뷰 발제하고 진행해. 알겠지?"


왁자지껄했던 점심 식사 자리가 끝나고 강기자 일행은 일식집 밖으로 나왔다. 신임 부장은 벌게진 얼굴로 야구단 홍보팀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거리에 가득한 인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갑'의 겸손을 보여주려는 행동이었다. 황망한 얼굴로 마치 맞절하듯, 더 깊이 허리를 숙이는 홍보팀의 인사를 즐기는 부장의 얼굴에서 의도가 엿보였다.


"그럼 들어가시고. 난 씻고 들어갈 테니까, 오후 회의는 김차장보고 들어가라고 그래"


부장을 떠나보내고 강기자는 구단 관계자들을 배웅하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태블릿 PC 덕에 앞으로 한 동안은 직장 생활이 편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홍보팀도 강기자의 이런 마음을 아는 듯 미소를 지으며 훈훈하게 헤어져서 돌아서는데, 강기자가 무언가 불현듯 떠올리며 홍보팀에게 뛰어갔다.


"팀장님. 그 아까 부장 말씀하신 감독님하고 인터뷰 잡아 주시고요."

"시즌 전에 쉬시느라 인터뷰하실지 모르겠네"

"에이, 해 주셔야죠. 부장이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꼭 좀 부탁드리고"

"네, 부탁드려 볼게요"

"그리고..."

"...네?"

"저희 회사 야구팀 곧 연습 시작하는데, 남는 공이나 방망이 좀 협찬해 주시면 안 될까요? 헌 거도 괜찮아요. 꼭 좀 부탁드려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홍보팀은 서둘러 돌아서 발걸음을 옮겨 택시를 잡아 탔다. 강기자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회사 앞까지 찾아 준 홍보팀이 정말 고마웠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히 가세요."


강기자는 떠나는 택시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 모자하고 잠바도 좀 챙겨 달라고 말하는 걸 깜빡했네"


강기자는 '이래서 낮술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려다가 손이 시려 참았다. 직장인 강기자는 알찬 점심 식사였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오후 보고를 올리기 위해 빠르게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언론사나 구단과 무관합니다.


#야구단 #민원 #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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