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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장인 모 기자 May 10. 2021

스포츠부 강 기자의 라스베이거스 출장기(2)

"간담회는 안 하나봐요?"

"무슨 간담회 같은 소리야. 일단 한잔 해"


형식적인 간담회라도 기대했던 강기자에게 돌아온 건 소주가 진하게 양념된 맥주뿐이었다. 한강회관 벽 한 쪽에 붙은 '언론인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랜카드 아래에서 기자들과 구단 관계자, 농구협회 관계자들이 불콰한 얼굴로 술잔을 주고 받으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불판 위에 남은 돼지갈비들은 다 타서 쪼그라들어 있었고, 먹지도 않는 육회와 계란말이, 김치찌개, 빈 소주병과 맥주병이 테이블에 가득했다. 여기에 담배꽁초 가득한 재떨이까지, 1990년대 을지로 고기집에서나 보일법한 광경이 21세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감독님, 오셨습니다"


조금 전에 서둘러 나갔던 홍보팀장이 A구단 P감독과 함께 식당에 들어왔다. P감독과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던 강기자는 잠시 들뜬 마음이 들었다. 80년대 농구판을 주름잡았던 P감독은 은퇴 이후에도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사투리 섞인 걸죽한 입담으로 인기를 끌었다. 식당에도 몇 번 왔던 듯, 입구에도 P감독이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과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강기자의 기대와 달리, P감독은 굳은 얼굴로 들어와 고참들이 모인 테이블에 앉아서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도, TV에서의 입담도 없었다. '말술'이라는 소문과 달리 술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 강기자는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P감독, 왜 그래"

"에이, 씨X, 한창 피치 올리고 있는데 부르고 지랄이야"

"그래도 한 잔 해"

"안 돼, 안 돼. 내 철칙 알지? 난 절대 술 먹고 도박 안 해. 내 인생의 원칙이라고"

"술 먹고 운전은 하잖아"

"그건 습관이고"

"자자, 다들 한잔씩 따르자고, 감독님 건배사는 들어야지"


기자들이 가득 채운 술잔을 들었다. P감독은 마지못한 얼굴로 잔을 들고 일어났다.


"언론인분들, 먼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도 대박 뽑아 갈테니, 아, 용병 얘기입니다. 아시죠? 언론인분들도 다들 대박 나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제가 대박 외치면, 언론인분들도 대박이라고 해주시면 됩니다. 대박!"

"대박!"


P감독의 '대박' 한 마디에 식어가던 한강회관 분위기가 돼지고기 불판처럼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난 월척 얘기하는 낚시꾼마냥, 누가 언제 얼마나 대박을 쳤는지가 테이블마다 안주거리로 올랐다. 


"K일보 오팀장있잖아, 그 양반이 작년에 200달러로 시작을 했거든? 그런데, 마누라 명품백 하나 사서 가더라니까?"

"저도 한창 잃다가 막판에 터져서 양주값은 벌어갔죠"

"저기, 저 협회 김과장은 매년 시계 하나는 사가더라고"

"강기자는 처음이랬지? 좀 쳐?"

"네? 아, 저는 뭐 그냥. 별로 해 본적은 없어서"

 "어이, P감독. 여기 강기자 이번이 처음이래"

"그래요? 며칠 안 보이시겠네"


빈정거리는 듯한 P감독의 말에 다들 미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강기자는 도박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미 취기가 올라온지라 마음이 동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까, 한번 질러? 씨드가 1000달러니까, 잘하면 금방 1만 달러는 가져 가겠는데'


그렇게, 강기자는 방에 대강 짐을 풀고 호텔 카지노로 직행했다. 취기가 머리 끝까지 올라 처음 가본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는 신세계였다. 코엑스마냥 끝이 보이지 않을 넓은 실내에서 흔들리는 강기자의 마음은 휘황찬란한 불빛과 기계음이 뒤섞여, <블레이드러너 2049> 같은 SF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술 취한 티 내고 싶지 않아 눈을 부릅뜨고 여기저기 둘러보니 아는 얼굴들도 꽤나 보이는 듯했다. 


강기자는 일단은 슬롯머신으로 향했다. 일단은 가볍게 시작하라는 선배들의 참된 조언을 따랐다. 코인을 바꿔 몇 번 돌리다보니 재미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블랙잭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강기자는 얼른 스마트폰에서 블랙잭 룰을 훓어봤다. 대학교에 다니며 동아리방에서 어깨너머 배운 것들이 기억났다.


'21만 맞추면 되잖아'


강기자는 500달러만 쓰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블랙잭 테이블로 향했다. 초록 테이블에 앉아 친절한 딜러에게 칩과 카드를 받으니 뭔가 있어보이는 듯 뿌듯했는데, 그것도 잠시, 공짜 술을 받아 먹으며 따고 잃고 따고 잃고를 반복하다보니 소복했던 칩도 바닥을 드러냈다. 


강기자는 허무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래 논 것 같지도 않았는데 벌써 500달러를 다 쓰다니. 마지막 남은 이성은 그만 접고 방에 올라가서 쉬라고 강기자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강기자도 뒤늦게 피로가 몰려오면서 슬슬 정리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그때 멀리 바카라 테이블에서 눈에 불을 켜고 집중하고 있는 P감독이 강 기자의 눈에 띄었다. P감독 옆에는 한때 한국 농구판을 주름잡고 국제무대에서 메달도 목에 걸었던 왕년의 농구스타들이 여럿 보였다. 모두 프로팀에서 감독 혹은 코치로 활동하는 자들이었다.


강기자는 잠깐 인사나 나누고 구경이라도 할겸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서려 하자 검은 정장을 입은 흑인과 백인이 강기자를 막아섰다. 강기자는 손으로 P감독과 농구스타들을 가리키며 어설픈 영어를 내뱉었다.


"아임 코리안 저널리스트. 아이 윌 플레이 카드 위드 뎀"


강기자를 막아선 이들은 전혀 흔들림 없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강기자는 카지노에서 인정한 VIP들만 들어가는 테이블이니, 얼마 이상의 칩을 가져와서 꽤나 큰 돈을 걸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을 겨우 알아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열불이 났다.


'이런 경비 새끼들이 종합지 기자를 막아? 저것들은 내가 이 수모를 겪는데 쳐다보지도 않는단 말이야? 확, 불법 도박으로 기사를 써버려?'


술이 올라 씩씩 거리는 강기자에게 흑인 경비가 친절하게 안내했다. "저쪽에 일반 테이블 있다고"


강기자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일반석에 앉았다. 다른 기자들이 있었지만, 서로 아는척을 하지는 않았다. 강기자는 주머니에 구겨넣었던 나머지 500달러를 칩으로 바꾸고 게임을 시작했다. 결과는 블랙잭 테이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다가 잃고, 따다가 잃고. 그리고 나서 칩은 바닥을 드러냈고.


강기자는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용카드를 꺼내 500달러를 더 인출했다. 블랙잭을 하고, 바카라를 하고, 힘이 들면 슬롯머신을 돌리며 공짜 맥주와 칵테일을 마셨다. 잃고 따고 취하고, 잃고 따고 취하고. 

무한루프에 빠져있던 강기자를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강기자는 술롯머신에 엎드려 자고 있다가 눈을 떴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벌써 정오가 다 돼 가고 있었다. 네이버에는 인터넷 언론사가 쓴 용병 트라이아웃 소개 기사가 벌써 올라와 있었다. 강기자는 정신이 버쩍 들었다. 종합지였지만, 인터넷 기사도 막아야 하는 시대였다.


강기자는 얼른 방으로 올라가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 기사 몇 개를 '복붙'해 아침 보고를 만들고 간단한 온라인 기사까지 송고했다. 바이라인은 '라이스베거스=강기자'로 달았다. 강기자는 스마트폰 알람을 맞춘 채 잠을 청하는데 식당에서 들었던 P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며칠 안 보이시겠네"


강기자는 그 말 뜻을 그제서야 이해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블랙잭과 바카라 전략을 생각하며.


※ 위 내용은 픽션입니다. 실제 언론사와 농구단 등과 무관합니다.


#다그런건아냐 #기자도사람 #라스베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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