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막히게 더운 공기가 강기자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강기자는 졸린 눈을 부릅뜨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커다란 캐리어를 끌었다. 멀리 전세 버스가 보였다. 강기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만 기대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따, 역시 라스베가스라니까. 강기자, 잠깐만 서봐. 사진 하나 박아줄게"
함께 온 사진기자 선배의 들뜬 목소리가 강기자를 성가시게 했다. 비행기에서부터 옆자리에 앉아 쉴새 없이 떠들어 댄 터라, 강기자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대선배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강기자는 찡그린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잠시 카메라를 바라보고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어느샌가 사진기자가 따라와 강기자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라스베가스는 처음이지? 원래 용병 트라이아웃은 팀장들 출장인데, 어떻게 왔대? 김차장이 농구팀장 아녀?"
사실 라스베이거스에는 김차장이 오려고 했었다. 한국에서 뛰고 싶어하는 미국인 농구선수들을 각 팀 감독들이 점검하는 용병 트라이아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꿀출장'이었다. 딱히 경기도 없는데다가 농구의 인기도 시들하기만 하니, 용병 점검이 관심있는 기사거리가 될리 없는 탓이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은 기사 안 쓰는 기자고, 가장 좋은 출장은 기사 안 쓰는 출장이라는 우스겟소리가 있는데, 이번 출장이 딱 그랬다.
강기자는 출장 가고 싶다고 손 든 적도 없었다. 다만, 스포츠부장이 "이제 애들도 좀 보내줘라"고 김차장에게 양보를 강요했을 뿐. 물론 부장도 생각은 있었다. 김차장이 가봐야 놀기만 하니, 이제 5년차인 강기자를 보내서 뭐라도 기사거리를 만들어 오라는 취지였다. 이런 의중을 부서 회의에서도 전달하기도 했다. "강XX, 가서 술처먹고 자빠져 놀지 말고 꼭 농구 아니어도 되니까 뭐라도 기사 좀 써서 보내. 알겠지?"
하지만 그런 부장의 얘기가 라스베이거스 꿈에 부풀었던 김차장의 기분을 풀지는 못했고, 강기자는 출장 전날까지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
"강XX, 대전 좀 가지. 오늘 한화 경기 중요하잖아"
별 이슈도 없는 경기였고, 다른 기자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왜 뭐가 중요한지는 설명하지 않은 갑작스런 지시였지만, 강기자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많은 언론사에서 출장이나 휴가를 앞둔 기자들은 여차하면 휴가 자르는 중대장을 둔 이등병 같은 존재였다. 김차장이 뭐라도 꼬투리 잡고 출장 '킬' 시켜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제는 지시가 대전 현장 취재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야구가 끝나고 경기 결과 기사를 보낸 밤 10시 무렵이었다. 강기자는 기자실 자리 정리를 하던 중에 김차장 전화를 받았다.
"야, 5회 그 무사 만루 위기 있었자나, 그거 중심으로 하나 다시 써서 보내. 얼른"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했던 OOO(배구선수) 인터뷰하고, 그 화성 체육공원 기획있지, 그거 올려놔라"
강기자는 말문이 막혔다. 얼추 써놨지만, 기사 2개를 더 마무리하면 새벽 1시는 돼야 야구장에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일 오후 비행기도 타야했다. 짐도 물론 하나도 안 싸놓은 상태였고. 이런 얘기를 빙빙 돌려가며 하자 김차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행기에서 자면 되겠네."
"출장, 그냥 선배가 가실래요? 저 기획 다른 거도 잇고, 협회에서 표만 하루 미뤄주면 될 건데요"
"야, 됐어. 기사 빨리 써서 올리고, 너나 가서 농사 잘~ 짓고 와라"
강기자는 그렇게 밤새 한 숨도 못자고 미국으로 건너온 기억을 떠올리자 오랜 분노처럼 열이 뻗쳤다.
"강기자님, 괜찮으세요? 이번 트라이아웃 참가하는 주요 용병들 자료입니다"
그나마 시원한 버스에서 겨우 화를 누그러뜨리는 강기자에게 농구협회 홍보팀 직원이 접었다 펼 수 있는 서류 파일철을 주고 갔다.
'그래, 일 해야지, 일'
강기자가 파일을 열려고 하자 옆자리에 앉은 사진기자 선배가 옆구리를 쿡 찌르고 모른척했다. 강기자는 그제서야 뭔가 이상해 주변을 둘러봤다. 버스에 탄 기자 10여 명이 모두 자료를 보지도 않고 배낭에 서둘러 넣고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기자는 슬쩍 파일을 열었다. 100달러 지폐 10장이 서류 사이에 끼어있었다. 강기자는 의아한 얼굴로 홍보팀 직원을 바라봤다. 그 직원도 으레 그럴 걸로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강기자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씨드, 씨드(seed money·종자돈)"
"씨드?"
"에이, 씨 뿌려야 열매 따죠"
직원이 씩 웃으며 물러가고 난 뒤에서야 강기자는 이해했다. 왜 김차장이 전화 마지막에 "농사 잘 짓고 오라"고 했는지를. 강기자는 그래도 고민은 됐다. 100달러 짜리 10장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과거에는 거마비 관행이 비일비재했다지만, 강기자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핸드폰 메시지가 왔다. 김차장이었다.
'잘 도착했냐? 씨 잘 뿌리고 와라'
'괜히 판 깨지 말고'
답을 보내려는데 또 메시지가 왔다.
'기사는 안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라스베이거스의 뜨거운 햇살 아래 눈처럼 강기자의 화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때 버스 앞자리에 있던 홍보팀장이 일어났다.
"호텔에 짐들 푸시고요, A구단에서 간담회 할 예정인데요"
"에이, 뭔 간담회야"
"박차장님, 한국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죠. 간담회 장소는 호텔 앞에 있는 한강회관이고요, 주된 내용은 소맥하고 돼지갈비가 될 예정입니다"
팀장의 말이 끝나자 버스 안에 있던 기자 10여 명이 박수를 치고 화답했다. 강기자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른 기자들보다 나이만 조금 어려보일뿐, 이질감은 이제 거의 없었다.
... (2)에서 계속
※ 위 내용은 픽션입니다. 실제 언론사와 농구단 등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