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이는 9살이지만 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엄마, 아빠, 누나, 코자, 사자, 매미, 하마, 말, 좋아, 일이삼사오(많다는 뜻이다), 아~병원, 네, 아니야 등등 20개 정도의 단어로 의사소통한다. 요즘 제일 잘 많이 하는 말은 '싫어!'다.
회사를 다녀오면 가장 기쁘게 날 맞이해 주는 건 '찐'이다. 어디에 있든 아빠~~~, 하며 나에게 달려온다. 그리고 '하비야~'라고 말한다. '안녕하세요'다. 이 말은 '감사합니다', 가 되기도 한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다. 이부이에, 할랄리미, 짜부요이 등등 의미 없는 단어를 마치 말하듯 내뱉는다. 표정이 꽤 그럴듯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찐이는 말은 못 하지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장범준, 영탁, 유산슬이다. 최근에는 싹쓰리가 추가되었다. 노래를 틀어 놓으면 찐이는 그 가수가 된다. '흔들리는 꽃 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를 틀으면 마치 자신이 '장범준'이 된 듯 노래를 부른다. '사랑의 재개발'은 춤까지 완벽하다. 싹쓰리 노래를 틀어 놓으면 숨을 헉헉 거리는 엔딩까지 완벽하게 표현한다.
우리 집에서 사라지면 안 되는 가전제품 중 하나가 바로 '카카오 미니'다. 가장 열심히 일하는 놈도 이 녀석이다. 찐이가 '떼부~'라고 외친다. 믿기지 않겠지만 '헤이 카카오'를 부른 거다.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샴푸향'이라고 하면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를 틀어달라는 거다.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면 '사랑의 재개발', 엄지를 치켜세우고 앞으로 내밀면 '찐이야', 뒷 목을 잡으면 '네가 왜 거기서 나와'를 틀어달라는 말이다. 손가락 세 개를 턱 밑에 갖다 대면 '싹쓰리' 노래다.
노래를 틀어달라 요청하는 찐이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뒷목 잡는 영탁의 춤을 제대로 구현해 내는 찐이의 모습을 보면 근심이 사라진다. 싹쓰리 노래를 부른 후 숨을 헉헉 거리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찐이를 보면 내 삶이 빛난다.
미디어에 나오는 장애인 가족은 딱 세 가지 모습으로 압축된다. 먼저 우울하고 슬프고 힘든 삶을 살아나가는 가족의 모습이다. 장애가 있어 힘든 모습, 이를 보며 슬픔에 잠긴 가족의 모습,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힘든 모습을 강조한다. 그들은 아주 잠깐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맛본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애인 가족은 행복하지 않다. 고통과 슬픔에 잠겨 있다. 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주 깊이 박혀 있다. 나도 그랬고 찐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분들이 깜짝 놀라겠지만 난 행복하다. 힘들 때도 있고, 우리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때문에 슬플 때도 있지만 행복하다. 이 글을 쓰기 전 찐이를 재웠다. 요즘 찐이는 내 마사지가 잠자리에 드는 루틴이 되었다. 찐이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손가락 마디를 꾹꾹 눌러주고, 배를 쓰다듬고, 팔과 다리를 어루만지다 보면 찐이는 눈을 끔뻑 끔뻑한다. 더욱 천천히 천천히 찐이를 느낀다. 오롯이 여기에 집중한다. 고민이 없어지고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정리된다. 행복하다.
두 번째 모습은 장애가 있지만 어느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서번트 증후군'이라 불리는 현상을 집중 조명한다. 자폐 혹은 지적 장애가 있지만 특정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드러내는 것을 '서번트 증후군'이라 한다. 모든 자폐증에는 서번트 증후군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발생 확률은 100만 분의 1로 지극히 낮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장애인도 무언가 잘하는 것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비장애인 아이들을 학원을 뺑뺑이 돌리듯,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이 교육, 저 교육, 이 치료, 저 치료 뺑뺑이 돌린다. 장애를 교육으로 극복해보려는 시도를 한다. 장애는 치료나 교육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다.
세 번째 모습은 장애를 극복해 내는 인간 승리 모습이다. '스티븐 호킹', '닉 부이치치',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진태(박정민)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된다. 장애가 있지만 열정을 가지고 노력해서 극복해내는 모습은 멋지다. 희망을 주고, 열심히 살겠다는 동기를 부여한다. 대단한 사람이고 본받고 싶은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러나 이를 강요하거나, 장애는 무조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연봉이 높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노오오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다르지 않다. 똑같은 사람이다. 하루하루 성장하고 배우고,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이 있는 똑같은 사람이다. 장애인 가족과 비장애인 가족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전쟁 같은 육아 속에 바쁜 아침을 지나 출근한다. 회사는 전쟁터고 사회는 지옥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상사 비위 맞추고, 하기 싫지만 좋은 척하며 일한다. 퇴근해서 내가 아닌 손에 든 치킨을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을 보며 웃음 짓는다.
장애가 있어 슬플 수 있다. 장애가 있어 힘들 수 있다. 그렇다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다. 장애가 행복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장애를 보는 미디어의 시선들,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들, 장애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 나의 시선이 행복을 앗아간다. 장애는 특별한 무언가도 아니고, 극복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갈색 눈, 금발, 피부색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듯 장애도 그렇다. 진정 극복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시선과 인식이다.
오늘도 찐이는 기타를 메고 마이크 앞에 선다. 그리고 장범준이 되어 노래를 부른다. 엄지를 치켜세우고, 뒷목을 잡으며 영탁이 된다. 손가락 세 개를 펴 턱에 대고 '싹쓰리'를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