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이는 장애 아동 통합 어린이집에 다닌다. 한 반에 3명 정도의 장애 아동이 비장애 아동과 함께 생활한다. 장애 아동 전담 교사와 보조교사가 함께 아이들을 돌본다. 그 어린이 집에서 부모 참여수업이 있었다. 아내는 불안해했다. 작년 참여수업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집에 가자는 무한 루프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찐이는 울기 시작한다. 그러다 크게 웃는다. 흥분도가 올라간다.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이탈한다.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선생님이 아이의 손목을 잡고 자리에 앉힌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소리를 지르며 다시 자리에서 이탈한다. 선생님은 손목을 조금 더 세게 잡고 자리에 앉힌다. 다시 울며 엄마에게 안긴다. 결국 아이를 데리고 교실 밖을 나온다.
찐이의 부모 참여 수업에 가는 길에, 내게 떠오른 이미지다. 입가에 잠시 쓴웃음이 머물렀다. 괜찮아... 괜찮아... 다독여 봤지만 쓴 맛이 쉽게 가시진 않았다. 아내의 손을 잡았다. 떨림이 전해졌다. 아내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이의 조그만 신발장에 내 신발을 구겨 넣고 슬며시 아이의 교실을 들여다봤다. 찐이다. 맨 앞에 앉아서 앞의 선생님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라고 부르며 밖으로 나오려 한다. 아내는 자신을 보면 더 울며 집에 가자고 할 거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내의 예측대로 될까 걱정이 쌓였지만, 그러면 어떠랴.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냈다.
나 여기 있다. 잘하고 있다. 조금 힘들고 외롭다. 아빠를 봐서 너무 반갑다. 날 보러 와준 거니 열심히 하겠다. 눈물이 조금 나오려 한다. 하지만 멈추고 수업에 집중하련다. 찐이의 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이의 시야에 드디어 엄마가 들어왔다. 아내의 예상은 빗나갔다. '집에 가자 무한 루프'는 발동되지 않았다. 찐이는 차분하게 수업에 집중했다.
영어 수업이 진행되었다. 아이는 선생님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5분에 한 번씩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엄마~~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우리가 손을 흔들어 주면 다시 선생님을 쳐다봤다.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주는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뛰어와 엄마에게 안기고 싶은 걸 얼마나 참고 있을까.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말하고, 선생님이 영어로 말해주는 모양을 찾아 칠판에 붙여 완성하는 활동이 시작됐다. 설마... 찐이에게도 발표를 시킬까? 시키면 할 수 있을까? 뛰쳐나가진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아이들 엄마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데... 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이 빨개지고 땀이 비 오듯 흐를지도 모르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찐이 차례가 되었다. 찐이는 웃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내가 평소에 하는 말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마~ 내이 이~ 찐이"
라고 말했다.
공개수업에서 우는 부모는 지지리 궁상이라 생각했기에 울지 않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찐이는 입을 앙 다물고 선생님을 쳐다봤다. 어린이집 교실에 가득 찬 박수 소리에 찐이는 스스로 흐뭇해했다.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얼굴이 보였다.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국말도 어려운 찐이가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말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눈치를 보았을까?
어린이집에서 특별 활동으로 영어 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 한국말도 몇 마디 못하는 애한테 무슨 영어냐고 했었다. 의미 없는 수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찐이에게 의미 없는 일이란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일,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한 친구의 반응을 살피는 일,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 모두 의미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우리 찐이 에게는 커다란 목표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도 찐이에게는 몇 달 혹은 몇 년간의 훈련이 되어 버린다. 에디슨 젓가락질은 몇 달에 걸쳐 특수 훈련을 받았고 대소변 가리기, 킥보드 타기도 마찬가지였다.
일어서기, 걷기, 말하기, 대소변 가리기, 젓가락질 같이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들이 우리 찐이에게는 커다란 성취다. 비장애인이 많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낸 쾌거, 예를 들면 시험 합격, 레이업 슛 성공, 1000피스 퍼즐 완성 등 과 같다.
이런 찐이의 성취를 사람들은 쉽게 생각한다. 우리 아이가 쉽게 쉽게 하는 일이니 그 정도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의미를 가지라고, 대단한 일로 생각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도전의 무게가 다르다.
누구를 밀지는 않을까, 머리를 잡아당길까, 누구에게 피해를 줄까, 노심초사하고 걱정만 하고 있느라, 크고 있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성장의 결과만을 쳐다보느라 고난과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찐이를 외면했다. 찐이가 짊어지고 있는 도전의 무게를 외면했다.
어디까지 성장했느냐 보다 성장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큰 목표, 작은 목표를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나누어 놓고 달성했는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 과정이 행복했는지,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찾았는지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도전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결과만 놓고 그 도전의 무게를 동일하다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