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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Dec 05. 2024

순간의 컨디션을 체력으로 착각함

기안84가 뉴욕 마라톤에 나갔습니다. 4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1년간 훈련했다고 하네요.


30km에 퍼질 거라고 생각해 1km를 5분 30초 페이스로 잡았다.
30km를 3시간 내 주파하고 난 후 상태가 안 좋을 테니 나머지는 ‘기어서라도 들어가자’는 생각이다.


기안84는 10km까지는 마치 이봉주처럼 달리다, 31km 지점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다리에 강한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근육들이 더는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그는 도로 한편에 쪼그려 앉아 숨을 골라야 했습니다.



저도 마라톤 초반에 기안84처럼 날아가듯 달렸습니다. 결국 허벅지에 쥐가 찾아왔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순간의 컨디션을 체력으로 착각한 탓이었죠.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3일 연속 9시에 잠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20대 이후로 3일을 연속으로 9시에 잠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3일을 보내고, 일요일 새벽 4시에 일어나니 컨디션이 정말 좋더군요.


상암 월드컵 공원에 도착해서 착실하게 몸을 풀었습니다. 작년에 나갔던 춘천마라톤에서 몸을 충분히 풀지 않아 초반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 이번엔 더 꼼꼼히 준비했습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러닝 전 동적 스트레칭 영상을 보며 배운 동작들도 활용했죠.


달리기 시작하니 좋았던 컨디션이 더 좋아졌습니다. 페이스를 5분대 후반으로 잡으려고 했는데, 점점 빨라져 10km를 넘어서니 4분대 후반까지 빨라졌습니다. 힘이 빠지기는커녕 더 붙는 느낌이었죠.

20km를 1시간 40분에 달렸습니다. 제 인생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나 잘 달리는구나. 이 정도 연습하고 이렇게 달리면… 혹시… 나… 달리기에 재능이 있는 걸지도…


정말 신나게 달렸습니다. 케냐 초원을 달리는 기분이었죠. 이 페이스대로라면 4시간 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 잡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오른쪽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볼록볼록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큰일 났다. 쥐다!


속도를 줄여 조심스럽게 달려봤지만, 25km 지점에서 왼쪽 허벅지에 쥐가 났습니다. 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습니다.


포기를 생각했습니다. 쥐는 한 번 올라오면 계속 올라오고, 그 고통은... 아는 사람은 알죠. 포기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저의 풀코스 참가 소식이 부서 전반에 소문났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너 마라톤 대회 나간다며? 대단하다.
과장님! 마라톤 나가신다면서요? 풀코스예요?


이렇게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나 달리다 포기했어…

이렇게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리를 주무르고 또 주물러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17km 중 절반 이상은 걸었습니다. 어찌 어찌 완주는 했지만 과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요. 순간의 컨디션을 제 체력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최소한 6개월 정도 계획을 세우고 훈련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4일 전에도 술을 마셨습니다.


마라톤은 순간의 컨디션보다는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형성된 체력이 더 중요한 경기였습니다. 제가 가진 체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컨디션을 체력으로 착각한 탓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던 거죠.



2년 전, 사내벤처에 도전했습니다. 팀을 구성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아이디어를 서비스로 발전시키고, 투자자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사내벤처에 선발되고, 정부 과제에 선정되고, 사외 투자자들에게 호평을 받으면서 제가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분사 실패. 다시 원래 부서로 돌아가 따가운(?) 조직장의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습니다.


분사에 실패한 후, 조금 냉정하게 당시 아이디어를 돌아봤습니다.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그렇게까지 성공하리란 확신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었지?


그렇습니다. 전 순간의 컨디션을 제 역량이라 착각했던 겁니다. 주변에서 해주는 "너 정말 대단하다"는 말에 취해 순간의 컨디션이 올라갔던 거죠. 내가 가진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컨디션을 내 역량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러니 서비스가 제대로 채워질 리 없었죠.


우리는 때로 지금의 상태가 너무 좋아 모든 걸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순간의 컨디션이 아니라, 그걸 뒷받침해 줄 체력과 역량입니다. 컨디션은 금방 지나가지만, 제대로 쌓은 체력은 끝까지 나를 지탱해 줍니다. 마라톤에서든, 회사에서든, 인생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보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무너지지 않는 것, 무너지더라도 천천히 내 시간을 갖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마라톤이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 자신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알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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