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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안'과 그녀의 사랑

by 레일라
나는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짐승처럼 다른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딱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을 경멸했는데, 그런 감정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때까지는 좋게든 나쁘게든 그런 식으로 나를 판단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파리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책의 작가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세기의 베스트셀러 작가'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5년을 살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일화를 꼽으라면 아마도 각 구 여기저기에 위치한 서점을 찾아다니며 그녀와 그녀의 글에 대한 서점지기들의 코멘터리들을 읽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후회하는 점은 셀 수 없다. 나는 왜 집 골목에 있던 작은 서점 한 편의 'Sagan' 코너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지 않았었나. 왜 시립 도서관에 꽂혀있는 사랑과 철학에 관한 책들을 전부 읽어볼 욕심을 내지 않았나. 친구들이 사랑에 관한 토론을 첨예하게 나눌 때 그 사이에 적극적으로 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나...




석사과정을 공부하느라, 일을 하느라, 버스킹을 떠나거나 레슨에 매진하느라 시간이 없었다는 건 변명이다. 왜 조금 더 그녀에 대해 찾고, 읽고, 쓰지 않았을까. 나 또한 많은 사람들처럼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그녀의 문체에 서서히 빠져들었던 독자 중 한 명이었고, 한국에서 뒤늦게 모두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뒤늦게 열광할 때 (물론 소설 원작과는 관련이 없지만, 타이틀을 빌려옴으로써 수강의 매력적인 문체와 감정선들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고) 나 또한 파리에서의 기억을 끌어올리게 되면서 한동안 다시 그녀의 글에 매료되었었다.




사강의 수많은 캐릭터 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슬픔이여 안녕> 속 '안'은 한동안 내게 시니컬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을 당당하게 원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존재였다. 책 속 주인공인 세실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옛 친구인 안을 열일곱이 되던 해에 다시 만난다. 자신이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믿고 있던 그녀는 아버지의 연인으로서 '안'을 다시 조우하고는 자신 안에서 서서히 변화하는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마흔두 살의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아주 매력적이고 세련되었고, 도도하고 지친듯하며 주변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비난할 만한 점은 그 무관심뿐이었다. 안은 사랑스러운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녀에게서는 의연한 의지력과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진정한 차분함이 풍겨 나왔다. 이혼을 하고 자유로운 상태였지만 연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우리와 안은 어울리는 사람들이 달랐다. 안은 세련되고 지적이고 신중한 사람들과 사귀었고, 우리는 떠들썩하고 뭔가를 갈구하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슬픔이여 안녕>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녀가 살아난 듯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차가운 얼굴로 세실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을 마치 위고 광장의 한 살롱에서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왜일까, 안? 생각해 보면 처음 <슬픔이여 안녕> 책을 펼쳤을 때 '몇 번의 데이트, 입맞춤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오는 권태 이외에는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세실의 고백 부분을 읽고 나서 나는 무척이나 흥분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흥분은 안이 세실에게 "넌 사랑을 너무 단순한 걸로 생각해. 사랑이란 하나하나 동떨어진 감각의 연속이 아니란다..."라고 나직하고 참을성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었을 때 비로소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이제까지 내가 알았던 사랑, 했던 사랑은 모두 그런 것들이었다. 어떤 얼굴, 어떤 몸짓, 어떤 입맞춤 앞에서 문득 솟구친 감정, 일관된 맥락 없는, 무르익은 순간들. 세실의 정의만큼이나 허무하고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누구와도 같이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왔던 때가 있었고, 그렇지 못한 관계들로부터 절망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 하지만 나와 세실에게는 이 외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지난날, 한 사람에게 다층적으로 존재할 모습들 중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취했던 동시에 나는 내가 약하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채 사랑만을 말하며 타인이 나를 평범하고도 추상적인 개체로 생각해 주기만을 바라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책 속 안이 세실을 자기 성찰에 세계로 이끌고, 서툰 그녀를 몰아세우거나 그녀의 행동을 매몰차게 제한할 때 나는 마치 안이 내게 꾸짖는 듯 마음이 아팠다. 그녀와 실제로 대화를 하는 듯 느껴져 흠칫한 적도 있다. 나는 책을 덮고 나서야 그녀의 힘을, 소설 속의 한 주인공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공된 보석같이 간명한 그녀의 단정적인 표현에 나는 매혹되었다. 어떤 말들은 미묘하게 지적인 분위기가 풍겨서 그 의미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경우에도 나를 매혹한다. 그럴 때면 나는 작은 수첩과 연필을 갖고 다니며 그 말을 받아 적고 싶었고, 안에게도 그렇다고 털어놓았다... 안의 판단에는 심술궂은 의도에서 보이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면이 없었다. 다만 그래서 더 가혹한지도 몰랐다."




아직도 사랑을 이야기할 때면 여전히 갈피를 못 잡기에 여러 개념과 정의들을 나열해 보고 공부하고 느끼려는 노력을 들인다. 다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경험한 사랑은 사실상 여태까지 나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찰의 도구로 쓰여왔다. 그녀는 차갑지만 단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사랑과 세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말한다. "그건 다른 거야. 지속적인 애정, 다정함, 그리움이 있지... 지금 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모든 것을 걸고 믿기를 '선택'했던 안은 안타깝게도 불의의 차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엔딩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에 성공과 실패는 없다고 믿는 정직하면서도 현실적이기도 한 여성이자, 나의 '안'이었다.




그런 그녀를 잊지 않으려 한다. 그녀의 비극적 엔딩과 더불어 전 책에 걸쳐 묘사되는 그녀의 서사와 존재는 내게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전해주기에 다분했다. 오랫동안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사회운동가인 벨 훅스가 사랑에 대한 교과서 같은 지침을 전해 주었다면, 사강은 내게 '안'을 통해 지난 돌이켜볼 수 있는 사랑의 거울을 선사한 셈이다. 책을 다시 집고 읽을 때마다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지는 그녀의 말과 모습은 내게 영향을 주었던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 중 단연 색깔 짙은 존재로 남아있다. 사랑에 흔들리고 아픈 때, 나는 어김없이 이 두 사람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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