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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집과 큰 도시

by 레일라


파리 곳곳에서 거주하며 나는 도시의 다양한 결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었다. 틈틈이 글을 쓰는 행위는 파리에서 나를 증명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는 파리에서의 나의 존재를 지워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더우면서도 추운, 말짱하면서도 어지러운, 든든하면서도 외로운 파도 같은 밤. 담벼락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포스터의 향이란 마른 병에서 나는 코냑의 향과도 같았다. 문득 외롭다고 느껴지는 날엔 카메라를 들었다. 문득 지나쳐버리는 사진 한 장에도 그때의 온도와 기억이 녹아있다. 차 한잔, 케이크 한 조각. 그리고 머리 위의 꽃들. 완벽하진 않지만 무심코 철렁이는 마음을 달래주기에는 충분한 영감들이었다.



가만히 생각했다. 순수하게 서로가 뱉은 말들을 모두 지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내가 여태껏 했던 크고 작은 약속들이 잘게 부서져 흩어져 있는 내 과거로 돌아가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고 사랑으로 돌려주며 보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마음이 담기자 사진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손을 따라가는 시선, 그 시선을 담아내는 것. 담아내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것들이 보일지 궁금해졌다. 카메라를 통해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본다. 현란한 사람들의 발걸음, 그 사이 풍선 하나로 하루 종일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부모. 가족 단위의 모양이 흔한 프랑스에선 주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창 사진을 찍고, 또 감상하다 보니 가을을 끼얹은 아침 산책에서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한 끼도 먹지 않았던 하루의 끝에 오랜만에 le Nemours에 들렸다. 저녁을 해결하고 여차하면 한 잔까지 하고 들어올 계획이었다. 일찍 도착해 꼴레뜨 앞을 한참 빙빙 걷다가, 분수대 앞에 괜히 앉았다가, 일어났다가를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음날 나는 공원으로 향한다. 주로 혼자 앉는 벤치가 있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일요일 아침에는 주로 vide grenier 가 있어 골목골목이 조금은 소란스러운 모습인데,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도시소리는 줄어들고 새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나무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길목에 서서, 곳곳에 전시된 그림처럼 세상이 환상적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랑빌의 섬뜩하면서도 섬세한 묘사가 현실을 모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처럼 다가온다. 시계추와 숫자는 이곳에서은 무용지물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무한대로 흘러갔다. 나는 글로서 시간을 붙잡아두려 하고,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기엔 공원이 안성맞춤이니까.



파리 한복판에선 매일 들려오는 앰뷸런스와 차소음,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에 치이기에 도시의 북적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새는 짓는 터전을 훼손시키지 않고 공해를 일으키지 않는 한옥의 고요함과 현대에서는 낯선 생활방식에 눈길이 간다. 자연에 동화되어 존재하고 모든 것이 순응하는 한옥은 단점으론 겨울에는 춥지만 적절한 습도유지가 용이하기에 파리에 딱이라는 생각이 든다. 춥고 마른 파리의 겨울, 따스한 온돌이 깔린 한옥에서 사는 상상. 자연과 조화된 삶, 계절과 호흡을 같이 하는 공간. 파리의 겨울엔 추울 테지만, 습도 유지가 용이한 온돌과 다듬어진 통창의 구조는 마음을 차분히 만들어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다시 카페테라스에 앉았고, 젖은 거리 속에서 꼭 맞잡은 손들 사이로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파리의 여름밤은 최고의 축제라는 말이 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여기저기 수아레가 열려 떠들썩이며 도시는 잠에 들지 않는다. 불빛과 음악은 새벽 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울리고 거리에 서서히 차가 많아질 때쯤에야 잦아들기 시작한다. 오후 낮 시간 동안은 또 다른 색의 도시로 분주하다가, 저녁이 되면서 또다시 강 어근, 카페와 바 근처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북적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 보이는 지하철 철도는 텅 비어 있었다. 역시나 또 파업이었다. N선과 R선 두 개의 노선이 겹치는 시간에 그것도 출근 시간의 파업이었기에 나는 부지런히 머릿속으로 다른 루트로 집에 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와중에 기록적인 더위라며 정부에서 띄우는 carnicure 경고가 각종 매체를 통해 울려댔다. 덥지만 고요하게, 떠들썩하지만 침착한 음악이 거리에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얼굴들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아틀리에로 향한다. 그렇게 나는 스튜디오와 거리, 공원과 카페 사이에서 나의 삶을 조금씩 이어 붙이고 있다. 한 문장이 머물다 간 창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되살아난 오후,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작업의 리듬 속으로.





파리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지냈던 스튜디오는 건물 깊숙한 안쪽에 숨은 듯 놓여 있었지만, 낡은 창문 너머로는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과 느리게 흐르는 거리 풍경이 보였다.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묘하게 연결된 공간. 조용하면서도 트여 있는, 그런 흔치 않은 구조였다. 처음 그 집에 들어섰을 때 느낀 인상은 ‘작지만 온기를 품고 있다’였다. 좁디좁은 화장실은 몸을 옆으로 돌려야만 샤워 부스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고, 작은 보일러는 금세 물을 데우는 힘을 잃어 샤워를 늘 서두르도록 만드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조차 낯선 도시에서 오히려 나를 나답게 만드는 풍경 같이 느껴졌다. 파리지앵들 모두가 갖고 사는 사소한 불편함을 나도 하나쯤은 품고 살고 있다는 감각이랄까.



전 집에서 가져온 책상과 책장을 무심히 배치하고, 퀸사이즈 침대 위에 흐트러진 커버를 폈다. 파리의 15구에 위치한 나의 마지막 스튜디오는 그 어느 곳보다 아늑했다. 다행히도 첫 원룸보다는 훨씬 넓었으며, 마찬가지로 단지 내 작은 정원 또한 있었기에 계절 따라 바뀌는 꽃을 지켜보기는 재미가 있었다. 누군가를 초대하기에도 썩 나쁘지 않은 집이었다. 어디에 머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나의 하루는 달라지고, 그 하루의 결은 결국 내가 확장해 가는 시장의 논리와도 가까이 닿아 있다. 집이 그렇듯, 아틀리에도 마찬가지다. 작업의 흔적이 고이고, 실수와 시도와 도전이 엉켜있는 공간. 방 한편엔 잊힌 악보 그리고 조용히 켜켜이 쌓여 있는 나의 과거가 자리하고 있으니까. 그곳은 내가 만들어낸 흔적의 집합이었지만, 그조차도 월세를 내지 않으면 지켜낼 수 없는 공간이란걸. 그곳은 바깥세상이 아무리 요동쳐도 유일하게 나를 고요하게 감싸주는 안식처였다.



일에 치여 바쁜 일상을 지켜내고 며칠 만에 다시 들른 어느 날. 문을 열고 불을 켰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아틀리에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정적 속에 멈춰 서 있다가 관리자에게 연락을 했다. 며칠 동안 빌딩 전체에 전기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자연광만으로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은 오히려 그런 불빛의 부재가 새로운 온도를 만들어주었다. 장비들과 책상 위에 흩어진 물건들, 벽에 그림자처럼 굳어 있던 시간들이 빛 없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가방 속에는 다행히 조그마한 터치식 플래시라이트가 들어 있었고, 그 미세한 빛으로 아틀리에를 비추는 순간 오래전 벽에 기대어둔 캔버스와, 배경으로 놓아두었던 조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조명들은 한동안 켜진 적 없었는데, 그날만큼은 꺼진 조명마저도 의미가 있어 보였다. 모노톤의 풍경 속, 모든 것이 잠시 정지해 있었지만, 그 정지된 시간 안에서 나는 오래된 음표와 선을 더듬거리며 피아노 위에 손을 얹는다. 가느다란 빛에 의지해 건반을 눌렀다. 낮게 깔린 음 하나가 방 안을 천천히 맴돌았다. 멈춰 있던 공기와 그림자들이 그 울림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전기가 돌아오면 이 순간은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꺼진 조명 아래서 마주한 나와 나의 악기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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