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 있는 글 한 꼭지를 끝냈다.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내게 기한을 넘기는 일은, 없다. 불안과 불행의 시간을 겹으로 겪고 나면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희망을 모색하게 된다. 지난겨울 동안은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발걸음에 묻어나는 고민과 피로함을 한 발자국씩 덜어내겠다는 의지로 씩씩하게 걸었다. 크림색 분홍이 만발한 꽃나무가 일 년에 한 번 피워내는 꽃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바람에 맞춰 흔들리는 동시에 수많은 인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주말 동안 다들 꽃놀이를 어떻게든 즐기겠다는 작정을 한 듯싶다. 빵빵거리는 차들과 도로와 인도를 넘나드는 형형 색색 옷차림의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음 달에는 문화예술 지원 촬영이 하나 잡혀있었다. 쉼이 절실한 동시 머릿속은 복잡하다.
급한 일 한 꼭지를 끝내고 나면 일상을 주로 기록하는, 힘이 빠진 글을 쓰는 여유 또한 필요하다. 마감이 있는 동안은 그마저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지난 겨울엔 르포를 울면서 마감을 했다. 프리랜서 작가, 회사원, 파트타임 공연예술인으로 다양한 직군을 넘나들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어디서 왔을까. 회사와 글쓰기에 동시에 도전하는 건 정말이지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번아웃이 쏜살같이 달려와 뺨을 치고 간다. 너 잠시 쉬어야 돼! 라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휴직을 결정한 후, 줄기차게 머릿속에 담겼던 여러 단상들을 적당한 필터를 거쳐 마구잡이로 써댔다. 글감이 어느 정도 차고 나니 또 어딘가 풀 데가 필요했나 보다. 기고하는 글과 일상 글 환기가 필요한 글 누군가의 말을 통해야 나오는 글 또는 읽어야 쓸 수 있는 글 등 사이를 왔다 갔다 널뛰기하며 그냥 잡히는 대로 글을 썼다.
당장 마감이 급한 일을 끝내고 나니 왠지 서늘한 마음이 들어, 교환레슨을 다시 재개했다. 네 달째인가 쉬다 내린 결정이었다. 청년 예술 관련 정책도 슬슬 풀리고 있는 데다가 더 이상 연주를 쉬면 안 될 것 같다는 무의식적인 위기감을 팀과 함께 느꼈기 때문일까. 피아니스트와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듀오로 활동해 오며, 어려운 시기에 시작한 팀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다양한 무대를 섭렵해 왔다. 마지막 공연이 아마도 라디오 라이브 출연이었는데 반응이 좋아 유튜브 채널에 올라가기도 하고, 둘이 함께 찍은 프로필 사진도 아직 여기저기 쓰이고 있다. 프로필 촬영 때 생겼던 에피소드도 각 잡고 쓰면 원고지 열 장은 나올 것 같은데... 하며 시간이 지난 아직까지도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아냐, 촬영이나 잘하자. 동시에 앞으로 재개할 레슨은 주 1회로 정했다. 긱(gig), 즉 연주가 잡히면 리허설은 레슨시간 외로 따로 잡는다. 몇 달만의 레슨에 서로 정신 못 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만에 호흡연습하는 거야 숨을 못 쉬겠네, 얼마 만에 눌러보는 건반이야 손가락아 힘을 좀 내야지 라며.
다시 연습에 들어간 연주곡은 liberetto. 연이은 같은 자리 노트가 많은 곡이라 터치연습에 도움이 된다. 라스 다니엘슨(Lars Danielsson)은 스위스 출신 베이스 겸 작곡가로, 그만의 개성이 담긴 곡들을 60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주자이다. 코드와 베이스가 심플할수록 (그만큼 채워야 하니) 연주는 어렵지만 그만큼 집중한다면 빨리 늘 수 있고 게다가 한 번은 꼭 완곡하고 싶었기에 재개한 것이다. 동시에 바카이(Vaccai), 스탠더드곡 컴핑 등 총세곡을 손에 다시 ‘익히기’를 목표로 삼았다. 삐걱거리는 손과 어깨와 허리는 다시 고통을 받을 예정이다. 어쩔 수 없지, 연습이란 몸이 아픈 일인데. 아프고 고된 만큼 머리와 손이 기억하는 프레이즈와 테크닉은 늘게 된다. 1+1=2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1+1=0 일 때도 있고, 1+1=1일 때도 있다. 물론 1+1의 값이 2를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력은 평등하고 균일하게 느는 게 디폴트값이지만, 정체되어 그 자리에 한참을 머물러 있을 때도 있으니까.
문화예술재단에 선정되어 촬영을 진행할 때였다. 촬영 전에 작업 과정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인터뷰 지를 쓰며 떠올랐던 생각인데 영상에는 편집되어 따로 적어두었다. 집필을 하다가도, 망상에 빠지다가도 금세 집중력을 잃곤 하던 때 종종 그 탓을 미디어로 돌리곤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어느 시대보다 할 수 있는, 볼 수 있는 미디어가 넘쳐나는 세대인 요즘. 집필의 고독함을 라이브 방송으로, 텍스트(문자)로, 유튜브 시청으로, 전화 또는 페이스타임 같은 샛길로 달래려면 얼마든지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유혹에 넘어지고 또 저항하면서 서서히 나만의 글쓰기 기준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우선, 나 같은 경우엔 음악을 들으면 글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30대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평생 음악을 듣고 분석하고 카피하고 다루는 훈련을 익혔기에 아무리 새로운 분야의 창조에 임하게 되었다고 해도 습관적으로 배경 음악에 방해를 받았다. 뒷배경에 깔리는 음악이나 화이트 노이즈나 사람들의 대화도 물론 비슷한 원리와 정도로 작동한다. 무엇보다 소리와 빛에 민감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글을 쓰기 가장 적정한 조명은 너무 밝지 않은 화면과 노란 전등이다. 환한 백열등 아래에서는 그나마 몇 남아있는 창작욕구가 깡그리 사라진다. 마치 내면을 커다란 수술실 안에 있는 수술대 위 환자를 비추는 차갑디 차가운 빛 같이 느껴져서일까. 혹독한 빛 앞에서는 제대로 된 창작력을 발휘할 수 없다. 소음도 마찬가지다. 각종 자연에서 나는 소리 (산이나 계곡에서 하룻밤을 지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자연 속에서 발생하는 수만 가지 소리의 데시벨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마음에 안정을 준다. 하지만 도시의 한가운데서 살면서 가장 견딜 수 없었던 소음은 차, 오토바이, 경적, 타이어소리였다. 단단하게 굳은 아스팔트를 마찰시키며 강렬하게 나는 타이어의 고무 소리, 엔진소리는 아무리 낮거나 높은 (저층이나 고층) 곳에 있어도 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아틀리에 안을 채웠다.
그런 무언가로 형용할 수 없는 소리들에 괴로울 때도, 여름철에 잃어버린 입맛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도 요새는 자주 웃음이 난다. 촬영마저 끝난 봄 끝자락이어서 그랬을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의 작고 사소한 장면들을 혼자 포착하고선 즐거움을 느낀다. 혼자 중얼거리기도 한다. 재미있다고 느낀 어느 한순간들이 쌓여 나의 하루의 침전물들을 조용히 개어주는 것 만 같아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숨기려 애쓰지 않는달까. 순수한 마음으로, 눈으로 사람과 사물들을 바라보는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나 싶다. 한동안 이런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고, 매일이 즐겁지 않았던 것 같은데. 긴장과 스트레스 불안의 연속이었던-타인의 불행을 내 마음으로 옮기기 힘들고, 나 자신조차 줍기에 바빴던-지난날들은 찰나일지라도 결국엔 지금의 평화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실없는 모습까지 카메라에도 담겼을까.
도시의 다양한 소리와 내면의 재잘거림에 지쳐있을 때는 종종 문득 생각나는 가사를 흥얼거리고, 읊기도 한다. 그러다 떠오르는 멜로디나 가사는 노트 귀퉁이에 적어둔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서 헤엄치는 백조같이 적당한 텐션으로 회복하는 중이다. 물론 머릿속은 달력을 펴두고 기한이 남은 일들을 빠르게 계산하고 게으름을 경계한다. 이토록 혼자만의 시간을 영위하고 있는 내게 심리학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연민을 갖고, 힘들 때마다 그 감정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에 속한다고. 스스로가 어떤 취약함 때문에 '내가 이런 상황에서 넘어질 수 있었구나', '발목이 잡히는구나'를 인지하고, 절망은 하지만 '좀 쉬었다 가면 괜찮아. 단 나를 너무 재촉하지 말자.'라고 얘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날 자비롭게 바라봐주고 있었나. 생각해 보면 참 초라한 성적이다. 모든 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하나만 간절히 바라고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촬영을 잘 마치고, 그동안 밀린 글을 열심히 쓰고 읽었다. 평소 틈틈이 읽는 책들과 더불어 몰아치듯 이웃들, 동료 작가들의 글을 한 달치 정도 끝냈다. 다들 참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활자를 읽는 일 자체가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타인의 지식 또는 감정을 쏟아낸 글을 읽기보다는 내 마음속 평화를 찾아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나는 늘 정리와 발전, 성장을 추구하지만 참 그게 마음처럼 안될 때가 많기에... 갈구하는 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도 버겁기도 하고.
일이 또 한소끔 끓었다가 가라앉은 냄비에 말라붙은 것처럼 가물 수도 있다. 창작의 소리를 또 서걱서걱 낼 때가 그리워질 때가 오겠지. 씁쓸한 기분이 들어 창문을 열어두고 있는데, 여름내음이 나쁘지만은 않다. 이 정도의 긍정성을 품고 있는 마음이라면 뭐든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랑이 부족하다면 부족한 대로, 쉼이 부족하다면 조금은 느린 속도로 살아내면 되니까. 끊임없는 성찰을 일삼고, 나의 위치성을 확인하는 불안함을 견뎌내는 일. 여유가 생기면, 아틀리에로 주스를 채우러 가는 일.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시선을 놓지 않되 습관, 실력을 갈고닦는 꾸준함. 이러한 매일매일이 모여 ‘나’의 정체성을 이룬다. 나는 그저 기록하고 버틴다. 다소 느리고 어설프더라도, 언젠가는 이 불안과 습관들이 나를 말해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오늘의 내가 조금이라도 더 단단해진다면, 그건 어제의 내가 나를 지켜낸 덕분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