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예술가인가요, 교육자인가요, 프리랜서인가요?” 아니면... 뭐라도 믿고 싶은 사람인가요?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머뭇거린다면, 대답은 어느 쪽도 완전히 ‘예’가 되기 어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연주자, 교육자, 프리랜서, 다양한 N잡을 행해온 오랜 시간 동안 '예술가들'과 사회적 접점에 관심이 많았다. 자율성을 띈 예술가 정체성이 교육의 정체성과 상호보완되어 나타나는 지점을 연구하고 싶었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보다는 나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와 연결되어 있었고, 이는 확장되거나 후퇴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을 남겼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꼭짓점들을 걸어오며 구축된 생각은 예술가교사(teaching artist)라는 타이틀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거치며 자기 삶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정체성에 의미를 둔다. 정의는 나라에 따라, 제도에 따라, 스스로 어떻게 기준을 세우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나는 ‘예술가로서 나는 누구’ ‘교육자로서 나는 누구’ 등의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동시에 무대 위의 사람이고, 동시에 피아노 앞의 학생을 바라보는 사람이며, 음악을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고 싶어 하는, 설명 불가능한 지점에서 머무는 '매개자'가 된다.
이런 자신을 연습하는 공간은 바로 아틀리에였다. 아틀리에를 떠올릴 때면, 처음에는 언제나 혼자만의 창작 공간이 생각났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점차 깨닫게 된다. 이곳은 결코 나만의 방이 아니라, 수많은 경계가 만나고 스며드는 교차점이라는 사실을. 예술과 비예술, 일과 쉼, 깊숙이 숨겨진 나만의 정체성과 일상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감각까지—아틀리에 안에서는 모든 경계가 흐려진다. 매개자인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나와 타인, 삶과 세계 사이에서 쉼 없이 조율을 반복한다. 이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한 점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시행착오와 실패조차 흔쾌히 받아들이며 관계와 가능성의 결을 발견해 가는 과정 그 자체임을 이제야 조금 실감한다.
하지만 매개자는 언제나 정답을 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실수하고 두려워하며, 불확실성 속에 머뭇거리는 순간이 많다. 그러나 그 반복과 흔들림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감행하기도 한다. 아틀리에는 그런 모든 시도와 실패, 때로는 상실조차 받아들이는 연습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완벽함이라는 허상보다, 매일의 변화와 서툰 대화, 실패 끝에 찾게 되는 새로운 감각이 훨씬 더 소중하니까. 매개자는 아틀리에를 통해 자신 또한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걸 깨닫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틀리에는 결과보다 과정을 껴안는 곳이자,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관계의 실험장이 된다. 어쩌면 아틀리에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늘 새로 쓰이는 작은 연결의 지도일지 모른다. 오늘 어설픈 손길, 미완의 시도, 뜻대로 되지 않는 노력이 모여 언젠가 타인과 의미를 주고받는 자리가 만들어진다. 완성을 지향하기보다 흔들림과 반복을 품는 동안, 나는 매개자로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아틀리에.. 작업실.. 그거 뭐 예술하는 사람들만이 갖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지만 아틀리에가 꼭 네모진 방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두 잔의 커피와 나란히 앉은 의자 사이, 때로는 각자의 휴대폰 너머로 오가는 안부 한마디, 혹은 생각보다 오래 머문 창가의 오후 햇살일 수도 있다. 나 또한 생각과 한계에 갇혀 오랜 시간을 허비했지만, 완성된 결과물이 필요 없어진 순간부터 마음을 조금 놓고, 여유와 함께 이 공간을 바라보게 되었다. 일상의 틈마다, 관계의 흐름마다 내 안에 자리한 작은 공간이 귀하게 느껴졌다. 실수 뒤에 찾아오는 서투른 위로, 반복만 하다가 끝난 한나절의 침묵도 내게는 값진 연습이었다. 어쩌면 매개자의 아틀리에는, 타인의 마음 곁에 잠시 앉아주는 용기 위에 세워지는지도 모른다. 관계를 매만지고, 내 태도를 비춰보며 익힌 작은 리듬들이 결국 나라는 집을 완성하지 않을까. 완성보다 중요한 건 오늘도 그곳에서 한 번 더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 삼켜지지 않은 마음의 언어, 살짝 흔들리다 마는 손끝, 사람과 사람이 겹치는 어설픈 악센트까지도 모두, 이 아틀리에 속에서 살아있는 풍경이 된다.
이곳에서는 예술과 비예술, 일과 쉼, 개인의 내밀한 정체성과 공동체의 경험이 서로 스며들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매개자는 바로 이 교차점에 서서, 실패와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시도하며 자신과 타인, 세상과의 관계를 조율한다. 완벽한 해답이나 단일한 의미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확실성과 모호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발견하는 것이 매개자의 본질적 역할이다. 아틀리에는 그런 의미에서 결과가 아닌 과정을 껴안는 공간이며, 매 순간 질문하고 흔들리며, 조금씩 나아지는 자신을 발견해 가는 연습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실패조차 관계와 변화를 위한 자산으로 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완성된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변하고 성장하는 존재로 다시 정의한다.
결국 아틀리에는 타인과 의미를 주고받으며, 반복과 흔들림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리듬과 태도를 길어 올리는 관계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술이나 교육의 언어가 결국 내 몸의 리듬, 하루의 시간, 환경과의 상호작용 위에서 성립된다면, 그사이의 전환은 필연적이다. 정체성은 제도적 명칭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어떻게 하루를 살아내느냐의 감각에서 싹트는게 아닐까. 그래서 다음으로 내가 바라보게 된 것은 거창한 직함이 아닌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 곧 빛과 시간, 그리고 리듬이 된다. 세상이 내게 요구하는 정답보다는 내 안에서 천천히 자라고 있는 질문과, 오늘도 누군가와 불완전하게라도 이어지는 용기를 매만지는 곳. 결국 아틀리에는 내 안의 물음이 멈추지 않는 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오늘의 서툰 대화와 조용한 시도 역시, 그 공간을 조금 더 나다운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작은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