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작업의 시작을 ‘어디서 바라볼 것인가’에서 찾는다. 관점이란, 같은 풍경을 다르게 번역하게 하는 사적인 문법이다. 지난 글 작업과 관련된 촬영을 하며 작품 활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작업을 하며 늘 되새김질하는 부분은 바로 관점이었다. 어느 기준을 가지고 일을 대할 것인가에 따라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조차 달라지기에 어느 관점에서 스토리를 풀지를 작업하며 가장 큰 염두에 두곤 했다. 질문은 평범했고 대답 또한 특별할 것 없던 기억이 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는 기록 자체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그 기록을 받아들인 내 마음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를 글로 다시 풀어내는 과정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글 작업을 할 때 옆에서 보면 담담한 표정으로 글을 쉽게 쓰는 것 같지만, 글을 쓸 때의 손과 마음은 종종 멈칫댄다. 내가 쓰는 이 문장이 오해를 남기지 않을까. 마음을 글로 건넨다는 건 늘 불안한 행위였다. 되새김질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건만,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하고 오래 품을 들여왔다. 처음엔 사진을 찍는 일도 글과 다를 바 없었다. 마음에 드는 앵글이나 피사체를 발견하면 카메라를 들고 한참 고민하고 있기 일쑤였다. 그런 내게 한 동료가 내게 말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눈에 먼저 담되, 고민하지 않아야 해요. 생각하는 순간 손은 느려지고 망설이게 되잖아요. 생각이 사진에 묻어나면 좋은 사진이 아니에요. 거침없이 셔터를 누르는 훈련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판단이 빨라야 한다는 의미였다. 손에는 언제나 핸드폰이 있으니 카메라를 켜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잘 찍고 싶은, 느낌을 담고 싶은 욕심이 문제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진은 당시 시간을, 느낌을, 분위기를, 온도 등 많은 것을 동시다발적으로 담는다. 글은 기억을 다시 써 내려가는 과정이라면, 사진은 그 기억을 반짝이게 만드는 창문이었다. 오래 지난날의 온도를 글로 복원하려 할 때, 사진이 그 온도의 빛깔을 먼저 들려주곤 했다. 전에는 사진을 보고, 그 정지된 화면을 떠올리며 글 작업과 연계했다면 이제는 반대로 지난 시간 속 힘겹게 써둔 글을 읽고 쉽게 사진을 떠올린다. 잠시 멈추어 서서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내 프레임 안에 시선을 담곤 했던 1년 전의 나, 혹은 스물네 살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 속에 카메라를 들고 찍는 나는 어디에도 없지만 사진의 존재 자체가 나를 증명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선명해지곤 한다. 그 골목 한편에 서서 시선을 향해 잠시 숨을 고르고 멈춰 섰던 그때. 복잡다단한 상황을 마주하고 조용히 카메라를 들어 올렸던 그때. 셔터는 곧 결단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망설임과 충동 사이에서,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순간이 그 둘의 경계에 있다.
이토록 단순하게 사진을 찍는 그 행위 자체에 머물러 있던 나는 2015년에 사일런트 스페이스를 통해 칸디다 회퍼 Candida Höfer를 만났다. 그는 시선과 접근에 대한 남다른 방식을 야기한다. 우리가 매일 보는 수많은 것들 중 과연 무엇이 중요한지, 그것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사진을 통해 던지는 그의 작품을 통해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그는 공간은 우리의 역사를 형성할 뿐 아니라 우리 역시 공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작가였다. 관찰의 매체인 사진을 나의 작업 과정에 얼마나 가볍게 투영해 왔던가? 겹겹의 시간을 흔적으로 남기는 일에 의미를 두고 작업한다는 그의 철학을 통해 큰 영감을 받았고, 그렇게 써둔 이 글의 마지막 수정일은 2016년 여름이었다.
집필을 하는 봄. 주기적으로 2주 정도의 시간마다 사진첩을 정리하며 작업에 숨 쉴 틈을 부여한다. 핸드폰 속, 카메라 속 내가 저항한 순간들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들여다볼수록 더욱 알 수 있었다. 사진을 찍은 나의 의도가 선명할수록, 나의 글 또한 명확해질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결국 셔터를 누르고 나면 비로소 내 마음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다시 글로 쓰는 순간, 가장 나다운 문장에 가까워지니까.
내가 가진 가장 모순적인 리듬은, 조급한 성격과 인내의 작업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 갈등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사진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칸디다 회퍼의 말은 내 안에서 계속 울려 퍼질 수밖에 없다. 시선 끝에 닿는 대상을 그 무엇보다 끈질긴 애정으로 탐구하는 동료 아티스트, 예술가들. 누구보다 빠른 판단력을 가졌지만, 수백 번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단 한 장의 결과물을 탄생시킨다. 아틀리에에서 수 없이 반복된 훈련으로 다져진 그들의 관점과 생각이 투여된 사진 속엔 후회가 없다. 글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많은 실수와 수정을 거쳐야 퇴고를 할 수 있는지 글을 써본 사람들은 안다. 소설가 김연수 님은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글을 고친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일필휘지로 쓰인 좋은 글은 세상에 없다.
주제를 알자. 나의 글은 동사가 약하고 표현력이 부족하다.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생각하고 말하는 언어는 한국어지만, 그냥 '써오기만' 했기에 '잘'쓰는 사람이라기보단 생활인에 가깝고, 하루를 채우는 영어와 불어는 나의 언어활동 퍼센티지 60%를 넘기에 늘 혼란스러운 상태다. 때문에 언어를 스위치 누르듯 빠르게 전환하는 유능한 번역가 또는 작가들의 능력이 진심으로 부럽다. 여러개 언어를 한다는 단점을 늘어놓으라면 A4 서너 장은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장점을 적으라면 손이 망설여진다. 게다가 자주 무너지는 꽤나 물렁한 멘털을 갖고 있으니,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나의 글을 읽을 '누군가'를 위한다는 심정으로 몇 번씩 읽고 쓰고 고치고를 지속해 왔다. 글쓰기는 내가 나를 표현하는 가장 사적이고도 공적인 수단이다. 그렇기에 읽는 대상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쓸 수 없고, 염두에 두고 쓰기 때문에 늘 몇 번의 수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나를 표현하는 것은 때에 따라 감정에 일렁이고 다사다난하다. 꼭 나의 하루와도 같이. 그런 내가 2년 넘게, 매일 같이 쓸 수 있었던 이유를 책 속에서 찾아왔다.
레슨이 없거나 별다른 일이 없는 쉬는 날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꼭 어제 읽던 책을 완독하고 필사를 해야지,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정리해 글로 써내야지, 밀린 공부를 해야지를 꼭 다짐하지만 점심까지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하늘이 약간 어스름 해질 때까지 책상 주변을 비벼대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아틀리에로 향해 집을 나선다. 조금은 정리가 될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마음으로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조용하지만 무거운 공기가 나를 자유롭게 한다. 단순하게 스케일 연습을 할 때도, 루틴을 할 때도, 곡을 지정해 연습을 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앉아서 생각을 한다. 팔을 들어 건반을 누르기 전까지, 어떤 마음으로 나는 여기에 왔는가를 생각한다. 보통의 루틴으로 손과 목을 풀어주고 나서야 이제 뭔가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글에 대한 생각을 늘 놓지 않기는 하나, 온전히 쉬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환한 햇빛이 방을 가득 채울 때까지도 부러 침대에 누워있는 날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내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방바닥을 무릎으로 기며 청소를 시작한다. 이는 지난 저녁식사의 설거지, 화장실, 변기, 세면대 청소까지 이어진다. 청소노동에는 미미한 정도의 어떠한 욕구를 잠재워주는 힘이 있고, 깨끗해진 환경에선 뭐라도 하고 싶어 지니 높은 확률로 책상에 앉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글은 쉽게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중에서 건질만한 문장이 나오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기에 투자 대비 효율이 높지도 않다. 사실 가장 글을 쓰고 싶게 하는 일은 타인의 글을 읽는 일인데, 그냥 눈으로만 훑는 것이 아닌 나의 사유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연결할까 또는 영감을 어떻게 풀어낼까 하는 등의 작업이 동반되기 때문에 이 또한 체력소모가 꽤나 드는 편이다.
차라리 아틀리에로 이동하는 (보통은 지하철이나 자전거를 탄다) 일, 또는 사람을 만나는 일(물론 이것도 시간제한이 있기는 하지만)이 쉬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 글을 쓰면서 내 감정을, 그리고 감정이 담겼던 상황을 찬찬히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제야 비로소 상황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의 감정선이 직접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 시간을 돌아보는 데 시간과 품을 들이는 것이다. 이로 인한 장점은,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것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나와 타자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이다. 이는 종종 배움과 성찰로 연결되니 성장을 도모하는 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인지, 동시에 확실하지 않은 것들을 쥐고 있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한 발 늦게 따라가더라도 결국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습득하게 되는 과정, 그 언저리에 남는 찌꺼기 같은 감정들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남은 것들이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를 털어내려 무던히 노력했었다.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것만이 나를 채워지면 좋으련만, 글을 쓴다고 해서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진 않는 법. 이 사실이 전에는 그렇게 감당이 안되더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애매함의 끝을 손에 쥐곤 참 많이도 울었다. 관계, 현생, 감정... 이로부터 무엇이 남던 선명한 마무리를 짓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이도 저도 아니게 내 마음을 충분히 전달하지 않고 먹다 남은 밥 반공기 같이 서먹한 관계, 또는 빠듯한 월세 살이, 불완전한 커리어 등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사람일은 마음같이 되지 않는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이제야 흡수하는 중인 걸까. 이 또한 일종의 배움이었지만, 이런 관계로부터 얻는 배움은 나 혼자서만 완성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기쁘지만은 않았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메모장이든 노트북이든, SNS든, 누가 읽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썼다. 그만큼 소재는 많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을 씀으로써 의미를 정의 내리는 그 작업이 너무도 즐거웠기에 소재의 부재는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새로운 관점이나 유익한 정보를 담은 좋은 글을 써야지 하는 욕심도 있었지만, 초반엔 일단 그냥 썼다. 사실 글을 씀으로써 찾아오는 나의 내면의 평화가 너무나 좋았기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매일 쓰고 있었다. 때문에 일상이 망가지는 괴로운 일이 일어나거나 이사, 시험 같은 단기의 집중을 요하는 일이 겹칠 때에도 짬을 내 글을 썼다. 사실 요새 같은 때에는 어디서든지 글을 쓸 수 있지 않나. 핸드폰의 메모장에도 쓸 수 있고, 어딜 들어가든 냅킨 한 장 얻을 수 있으니 그 위에 쓰면 되고, 주변에 널린 pc방 덕분에 언제든 들어가 컴퓨터에 적어놓고 메일로 보낼 수도 있다.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 얼마나 사유 깊은 글을 생산할 수 있었겠냐만은, 그렇게 해서 모인 글의 조각들은 나를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빚는데 큰 몫을 했다. 어디에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아도, 당선되거나 등단하지 않아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 끝에서 탄생된 글.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내 소박한 글이 좋았다. 내가 읽은 만큼 쓰고 쓴 만큼 성장한다는 진리, 이는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내게 너무나 좋은 장치였으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거나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라고 권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도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버지니아 울프
첫 책을 출간하던 때. 한참 나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언어의 양을 감당하지 못해 낮과 밤을 여러 번 바꿔가며 몇 달을 매달리고 솎아내고 해서 책 한 편을 완성했다. 매일같이 수정하고, 또 읽고 하는 작업의 반복을 거듭했다. 글 솎는 일이 왜 잔혹한 육체노동이라 불리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이는 내 인생 처음 겪는, 설레면서도 참 고된 이상한 작업이었다. 게다가 독자라는 대상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때여서 무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주변에서 가장 많이 권유했던 주제, 즉 당시 나의 터전인 도시 '파리'와 '음악'을 주제로 잡고 내가 보고 느낀 것들 위주로 쓴 것들을 묶어 목차를 구성했다. 물론 내내 작업을 하면서도 나의 부족한 필력으로 어떻게 책 한 권이 만들어지려나 싶었지만, 그냥 하는 거지 뭐 있어! 외치며 글을 다듬었다.
당대의 예술작품들도 알고 보면 사소함에서 태어났고, 절실함에서 성장했다는 역사가 있지 않은가. 책을 쓰며 가장 조심스러웠던 것은 지역성에 대중이 흔히 부여하는 상투성인데, 고민 끝에 이를 배재하진 않고 적절히 배치했다. 나 또한 누구나처럼 오스만 건물이 주는 아름다움, 길거리 구석 곳곳에 숨겨진 예술가들의 흔적과 조각들에 충분한 위로를 받으며 파리를 향유한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저 낭만의 도시라는 인식을 뛰어넘어서 그 안에 살아가는 '나', 즉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재현되는 나의 서사를 그대로 담아낸 글을 지향했다. 여러 가지의 모습을 띄며 하루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냈고, 그 시간이 종이 위에 꾸밈없이 쓰였다. 남들과 다르지 않게 돈 앞에 망설이거나 무너지는 모습. 먹고사니즘을 고민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노래하는 모습, 그 사이사이 스며드는 사유들을 글로 담담하게 풀어냈다. 눈이 빠져라 오타를 검사하고 지금까지도 줄줄 외울 정도로 지난 에피소드들을 몇십 번씩 읽고 또 읽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틀리에에 가지 않고, 연습을 가장 오래 쉰 때가 이 책을 작업할 때였다. 이렇게 연습을 안 해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두려웠지만, 대신 글을 쓸 때면 연습으로는 늘 부족했던, 나의 지성과 노력이 깃든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이 나를 가득 채웠기에 버틸 수 있었다.
글은 말과도 같은데, 소통의 창구를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면 이는 상호 간의 담화가 아닌 독백으로 전락한다는 것. 다 말하지 않고도 잘 말하려면 그만큼 나와 상대를 파악하고 배려할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했다. 다 전하지 않고도 나의 뜻을 충분히 상대에게 전하려면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니까. 누군가 좋은 글의 요소는 사건과 감정을 끝까지 응시하는 힘이라고 했다. 나의 인생은, 그리고 나의 글은 이렇게 자주 길을 헤매곤 한다. 그러니 분명 좋은 글이 되어가는 과정이리라 믿는다. 좋은 삶이 되어가는 과정이리라 믿는다. 분명 한 곳에서 시작했는데 주제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장황한 부연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감정만이 남는다면, 글이 아닌 내 삶을 되돌아볼 것. 삶과 글이 일치하는 하루를 살아낼 것.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내 글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쓰이고, 수정되고, 읽혀야 할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면 모두를 기다리고 있을, 맛난 빛깔의 글을 내놓을 수 있게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