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아틀리에는 비어 있는 자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멀어진 친구의 체취, 잊힌 대화의 흔적, 또다시 문득 떠오르는 반려동물의 사소한 습관—그 모든 결핍이 나를 한 번 더 쓰게 만든다. 그리움은 항상 어딘가 남아, 익숙한 풍경을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커피잔 건너에 앉았던 오래된 얼굴들이 한순간씩 떠오른다. 왜 사람은 때로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관계의 온도가 깨지고 나서야, 그 빈자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되는 걸까? 사람은 떠나도 추억은 그 자리에 남아 마음을 조용히 흔든다. 특히나 연인은 말할 것도 없다. 매일같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알고 돌봐주던 이가 한순간에 사라지니까. 그 한순간이라는 것도 시간의 연속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장 이해받고 싶었던 사람이 내 일상에서 사라지는 경험은 언제 겪어도 괴로운 일이다. 어떤 관계이든 데드라인이 있는 건지. 영원할 것 같았던 관계도 이 정도였나 보다 싶은 때. 감정적이고, 순간적인 모든 마음들 간의 간극을 힘이 없는 채로 바라본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언제부터였을까? -채로 바라본다. 힘 없이.라는 수동적인 뉘앙스가 깃든 문장에 눈길이 갔다. 하루에도 많은 선택을 만들고 또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유보하고 싶었던 많은 순간들 속에서 나는 떠올렸다. '-한 채로' 남아있는 나의 수동적인 모습을. 그런 나를 비추는 창가에 오래 머문 오후 햇살, 벽에 기대어 쉬던 의자, 함께 걷던 거리. 공간마다 각인된 기억들은 그리움의 풍경을 여러 겹으로 만든다. 어떤 날은 그 추억들이 무심히 일상을 감싸기도 한다. 이렇게 자잘한 그리움이 삶의 리듬을 바꾸고, 정말 하고 싶은 말로 작품을 밀어 올린다. 이렇게 아픈 채로 살 수는 없지 싶어 어영차 한 글자라도 쓰려 책상 앞에 다시 앉는다. 아이디어 이면에 자리한 결핍과 그리움은 늘 나를 새로운 시도와 질문으로 이끈다. 그리움은 멈춤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어떠한 문체이든, 내가 매일 적어보는 단어들, 서툰 질문과 느린 답변들 모두 그리움에서 비롯된다. 관계, 반려, 추억, 그리고 되돌아볼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창작의 자양분이 된다. 그리움을 붙잡고 마구 흔들리면서. (이 또한-흔들린 채로.)
나는 종종 사라진 것들, 닿지 않는 거리,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새 노트 위에 낯선 줄을 그었다. 글과 음악은 종종 그리움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리움이야말로 견고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겼던 기억, 되돌릴 수 없다는 실감에서 솟아나는 열망이 나를 다시 작업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폴더 안에 잠들어있는, 미완성인 멜로디들과 번호일기, 아이디어 노트들, 마인드맵으로 정리해 둔 기록들 등이 언제 쓰일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까. 1년 후, 5년 후, 10년 후가 될지, 또는 영영 일기처럼 하루에 쓰이는 자양분처럼 뿌려질지 알 수 없다. 끝없는 반복과, 때론 소진만 남는 긴 작업의 끝에서도 내가 다시 노트북을 켜는 건 그리움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는 곧 다시 시작할 용기가 된다. 만드는 일, 쓰는 일, 그리고 사랑하는 일 모두 어쩌면 그리움의 연장을 위한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움이 있기에, 늘 미완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관계를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과의 존중, 라포에서 배운 성찰들은 지금의 나를 세우는 단단한 계단이 되었다. 마주 섰던 순간의 따뜻함과 때로는 멀어진 거리 사이에서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움은 때로 아픈 결핍으로 다가왔지만, 결국 그 결핍 덕분에 나는 더욱 깊이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틀리에라는 공간은 단순한 작업실이 아니라, 그런 그리움과 성찰, 기억들이 쌓여 만들어진 내 삶의 층위이기도 하다. 관계의 흔적이 남은 그 공간에서 나의 창작은 다시 시작되고, 완성되지 않은 마음들이 텃밭이 되어 싹을 틔운다. 관계의 부재와 희미해진 기억 사이에서 새로운 영감을 찾아내기도 한다. 떠나간 사람들이 남긴 잔향은 작업실 어딘가에 남아 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아 가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그 울림이 나의 감각을 일깨우고, 익숙한 공간을 낯설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아틀리에는 이 모든 모순과 흔적을 품고 부드럽게 흔들리며 나를 성장시키는, 마법의 장소 또는 시간, 혹은 그 넘어가 아닐까.
늘, 관계에 배고픈 사람이었던 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스스로를 '관계가 많은 유형'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른 이들이 능동적으로 사람과 이벤트에 뛰어들 때면, 나는 오히려 뒤에서 천천히 그 흐름을 바라보았다. 다가와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런 자극이 자기 삶에 들어온다는 것을 어색하게 받아들이곤 했다. 마치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한 걸음 물러나 관찰하는 듯한 태도를 간직해 왔다. 지난 세월 동안, 그 삶에는 지나가거나 걸러진 인연도 많았지만 단 몇 명의 친구만이 가까이 남았다. 이들이 나에게 먼저 다가온 쪽이었다는 점이 나의 내면에 작게 따듯하게 남아 있었다. 누구보다 오래도록 삶을 함께하고, 기꺼이 노력을 기울여 이해해 준 인연들. 그러나 관계란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떤 관계에서는 연인이 친구의 자리를 대신했고, 누군가와 헤어지면 친구와 연인 두 가지 존재가 동시에 사라지는 아픔을 견뎌야 하기도 했고,.. 누구나 다 아는 뻔하지만 괴로운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때로는 웃으며 넘기던 말들이 가득했던, 지난 토요일 밤의 소소한 안부와 조촐한 위로가 떠오른다. 관계가 끊긴 뒤에도 기억의 조각들은 공간 곳곳에 남아 나를 어루만진다. 나는 종종 무언가를 준비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막막함, 평가받는 일의 불안함을 이야기했고, 그런 감정을 견디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정말 힘들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결국, 친구의 빈자리는 아틀리에에도 조용히 남는다. 얼굴을 보며 가삿말을 불러주고, 즉흥으로 피아노를 쳐주던 그때의 그 시간들. 다양한 방식으로 반가움과 서로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고, 생각의 흐름이 고여있지 않도록 노력했던 인연. 나에게 영감이 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좋은 기억으로만 남겨야 할 존재가 되었을지 모른다. 불현듯 다가와 밝게 빛났다가, 조용히 사라진 인연들. 그와의 지난 세월은 굳이 미화하거나 지워낼 필요도 없이, 각자의 삶에 담담하게 새로운 무게를 남겼다. 어쩌면 그리움이란, 그렇게 삶과 작업실을 넘나드는 가장 사적인 에너지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관계가 남기고 간 부재의 감정은 무심하게 침입했고, 익숙한 공간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날씨가 흐린 날이면 꼭 그와 나누던 노래와 언어가 생각났고, 창가에 오래 머무는 오후에는 함께 보낸 짧은 여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틀리에의 한 모서리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책장 사이에 끼워둔 녹음 파일, 피아노 위. 거기엔 둘만 아는 악보가 있었다. 이따금 머릿속을 휘감고 도는 질문, ‘타인에 대한 그리움은 왜 끝나지 않을까?’를 조용히 되새긴다. 지나간 시간을 억지로 해석하거나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어진 기억들을 조용히 보관하고, 빈자리가 만들어내는 울림을 작업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고자 애썼다. 어느 관계든 마침표가 있는 거겠거니. 조용히 마음을 다독인다. 과거의 교류 속에 머문 멜로디가 아틀리에에서 자주 흘러나왔고, 고요한 오후에 쓴 편지에서만 느껴지던 서정이 작품 곳곳에 밴 것을 발견했다. 사적인 그리움이 창작에 섬세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애매하고 잡히지 않던 부재와 외로움은, 오히려 음악이 자리한 공간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사소한 어긋남에서 비롯된 멀어짐, 그리고 그 뒤에 남은 긴 여운은 어느새 나의 작업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이전의 무심함에서 벗어나, 더 섬세한 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단절과 침묵, 연결과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이야말로 나의 아틀리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았던 관계의 흔적이, 사실은 더 조용하게 남아 있었다. 결국 나는, 이러한 그리움이야말로 나의 창작을 앞으로 밀어 올리는 계단이 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소중했던 인연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라진 관계를 다시 해석하려는 시도, 그 모든 것이 오늘 그를 한 번 더 음악 위에 앉게 만든다. 과거의 여름과 연습실, 화면 너머의 침묵까지도.
사적인 그리움은 멈춰 있지 않고 나를 앞으로 이끈다. 내가 경험한 모든 관계는 서로 다른 층위의 기억과 감정을 품고 있으며, 그 복합적인 무게 위에서 나는 다시 쓰게 되니까. 아틀리에라는 명칭 아래, 내 안의 흔들림과 성장, 창작과 성찰이 공존하며 나를 단단히 다듬는다. 그리움과 배움이 이어져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이 여정 속에서, 나는 오늘도 관계의 흔적을 품은 그 공간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떠올리는 그리움은 종종 타인의 그리움과 겹친다. 같은 계절, 같은 장소, 각자의 기억을 품은 사람들이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 겹침은 나를 다시 관계로 이끌고, 창작의 언어로 서로를 번역하게 한다. 완성될 수 없는 감정, 어딘가 빠져 있는 빈틈이야말로 작업의 미학이다. 나는 가끔 어설픈 손끝으로 그 빈자리를 쓰다듬으며 내 안의 사적인 그리움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 그리움이 자라나는 틈으로 잊지 못할 사람들이, 기억들이 그리고 일상이 흘러간다. 결국 모든 사적인 그리움이 모여 내 아틀리에의 바닥을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다시 한번, 익숙한 그리움에 기대어 창문을 열고, 내일의 시도를 마음에 새긴다. 그리움이 있기에 오늘 한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래서 지금도, 그리워하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