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0 Ways to take a break

by 레일라


쉼은 언제 찾아올까. 우리는 대개 쉼을 ‘의도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바쁘고 몰두해 있을 때 문득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나의 아틀리에서는 악보를 넘기던 손끝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예기치 않게 불어오는 정적 속에서 쉼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계획한 휴식과 다르다. 억지로 만들어낸 텅 빔이 아닌 긴장과 몰입이 자연스레 이완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고유한 형태.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리고도 소리를 내지 않는 그 정적에서 나는 놀라울 만큼 나 자신을 선명히 마주하게 된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굳이 소리를 만들지 않는 일. 그것은 나에게 단순한 무위가 아니라 또 하나의 연습이었다. 연습실 안을 감싸는 노란 조명이 벽을 따라 번지고, 빽빽이 꽂힌 악보들이 보이지 않는 합창처럼 나를 둘러싼다. 나는 그 안에서 연습을 멈추고도 음악 안에 머문다. 쉼은 이렇게 역설적이다. 음악을 중단함으로써 오히려 음악을 더 깊이 느낀다. 삶도 마찬가지다. 바쁘게 이어 붙인 시간의 음표들 속에서 잠시 쉬어야 비로소 삶의 선율이 들리니까.



완벽한 선율을 좇아 애쓰다가 문득 펜을 내려놓는 순간에도 쉼은 찾아오곤 한다. 작정하고 계획한 휴식보다, 우연히 불시에 찾아오는 작은 여백이 내 몸과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그 여백 속에서,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낙서 같은 흔적을 좇는 일 따위에 더욱 애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무질서한 흔적들이 주는 가벼움이 곧 진정한 회복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낯선 길 위에서 발걸음을 따라가며, 도로의 굴곡과 나무의 그림자를 음표처럼 읽는 순간 내 삶은 다시 새로운 리듬을 얻는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이동이 아니라 호흡이며, 사유이며, 기다림의 훈련같이 느껴졌다. 마치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릴 때, 그 시간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되듯.



가끔은 책장을 펼치고도 글을 읽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고 종이가 스치는 소리만 따라간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또 다른 문장이 구성되기도 한다. 식은 커피를 억지로 데워 마시지 않고 그대로 들이켜는 일도 마찬가지다. 불완전한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행위, 그것 또한 쉼으로 이어진다. 완벽의 강박은 나를 옭아매지만, 미완의 상태를 허락하는 순간 나는 오히려 더 자유로워진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곡이 건네는 불안정한 울림 속에서 나는 오래 머물고 싶다. 쉼은 완성보다 미완에 가까운 편에 존재한다.



연습 없는 쉼은 금세 방황이 되고, 쉼 없는 연습은 이내 고갈이 된다. 따라서 둘은 늘 함께 가야 한다. 나는 쉼을 도피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훈련으로 여긴다. 숨을 고르며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 없이는, 더 단단한 소리도 더 깊은 성찰도 불가능하다. 쉼은 나를 한발 물러서게 만들지만, 바로 그 거리감 속에서 나는 더 넓은 시야를 갖는다. 연습을 이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다. 결국 음악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을 가능하게 하는 나의 몸과 마음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창문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나를 멈춰 세운다. 연습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의 결이 의외로 정교한 선율처럼 들릴 때가 있다. 나는 그 단순한 울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이어폰으로 차단된 세상 바깥의 소리보다 이 작은 바람의 흔들림이 더 풍성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정리되지 않은 악보 더미와 흩어진 펜들도 억지로 통제하려 하기보다 그대로 바라본다. 혼란을 질서로 바꾸려 애쓰지 않고 혼란 속에 잠시 기대 보는 것, 그 순간이야말로 쉼의 본질이다.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에서 오는 평온, 그것이 쉼이 내게 가르쳐준 새로운 균형이다.



그리고 결국, 쉼은 나를 다시 돌아오게 한다. 말하자면 쉼은 단절이 아니고, 연속을 가능하게 하는 숨표다. 음악에서 짧은 침묵이 곡 전체의 호흡을 바꿔놓듯, 삶에서의 작은 쉼은 내 일상의 리듬을 새롭게 조율한다. 건반 위에서 소리를 멈추고 고요에 귀 기울이는 순간, 나는 음악 그 자체가 된다. 악보를 덮고, 소리 없는 연습실에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다시 예술가로, 동시에 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연습이다.




나에게 아틀리에는 오랫동안 작은 피난처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것은 나의 전공을 붙잡는 음악연습실일 때도 있었고,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아늑한 자리였으며, 악보가 둘러싸고 있던 하나의 우주였다. 때로는 사유의 방, 일상의 구석자리로 확장되기도 했다. 그곳에서 몰입하고, 연습하며, 정체성을 다듬곤 했다. 창조와 훈련과 성찰은 그 공간의 공기를 통해 자라났다. 그래서 아틀리에는 꼭 필요했다. 바깥의 소음을 잠시 차단하고 오직 내 내면의 속도에 맞추어 숨을 고르며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몰입은 창조적이지만, 끊임없는 몰입은 나를 쉽게 닫히게 만든다. 연습실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오히려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실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틀리에 바깥의 산책길, 해가 기울며 길어지는 그림자, 책장을 넘기는 종이의 바스락 거림, 식어버린 커피잔의 묘한 위로… 그런 사소한 쉼이야말로 아틀리에의 숨결을 다시 살려 낸다. 쉼은 작업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갱신해 주는 것이고, 쉼이 없다면 창조도 결국 메말라 버린다.



마찬가지로, 삶 안에서도 쉼은 같은 자리에서 필요하다. 사람은 달리기만 해서는 오래갈 수 없다. 잠시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길의 모양도, 함께 걷는 이의 얼굴도 보지 못한다. 쉼은 단순히 나를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조율하게 한다. 떠밀리듯 쌓이는 경험을 과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묻고 해석하게 하는 시간이 성찰이다. 성찰 없는 삶은 단순한 집적에 불과하다. 쉼과 성찰의 순간이 있을 때에만 경험은 의미가 되고, 의미는 곧 나를 더 깊게 단단히 지탱한다.



성찰이란 그럼 무얼까. 결국,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것은 화려한 성취나 완벽한 악보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다시금 내 삶의 리듬을 가늠하는 시간. 나는 연습을 통해 성장하고, 쉼을 통해 방향을 얻으며, 성찰을 통해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한다. 이 셋은 서로를 끊임없이 보완한다. 쉼 없는 연습은 무너지고, 성찰 없는 쉼은 공허하다. 그러나 세 가지가 함께 할 때, 삶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나는 안다. 쉼은 도망이 아니다. 쉼은 예술의 여백이며, 삶의 호흡이고, 나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출발점이다. 한 달 전, 나의 작은 아틀리에를 정리했다. 연습실의 고요 속, 소리가 비워진 건반 위에서, 나는 더 깊고 다른 깊이의 삶의 측면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무음이 음악의 일부이듯, 쉼 또한 나를 온전히 채우는 가장 근원적인 연습이니까. 언제부턴가 내 어깨에 짊어진 모든 것들을 들고 아틀리에에 들어가자니, 모든 것이 삐걱대고 균열에 맞지 않는 불협소리를 냈다. 삐걱삐걱. 이젠 좀 쉴 때야. 내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끌고 갈 수는 없어. 마음이 말한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작은 아틀리에를 놓아주기로 했다.



언젠가는 다시 만들 것이다. 짓고, 쌓아 올리고, 은은한 조명에 둘러싸인 조그마한 그 공간, 그 영원을 마주하리라 믿는다. 다시금 루틴으로 돌아갈 그날이 언젠가는 올 테니, 지금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고 되뇐다. 그동안 더 많이 쓰고, 성장하고, 성찰하며, 자라 있는 내가 되겠지-그만큼 한 뼘 자란 나에게 더욱 꼭 맞는 아틀리에가 나타나주기를. 이 쉼을 빌어 기록해 둔 나의 작고 소중한, 사적인 아틀리에의 순간들이 필요한 모두에게 가 닿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keyword
이전 09화사적인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