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멈춰야 비로소 시작되는 휴식
또다시 홍콩이다. 코즈웨이베이의 낯익음 가운데 낯선 추운 날씨로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역마살'이 있다는 내 사주풀이처럼, 나는 직업상 늘 어딘가로 떠나온다.(다음 화 참고)
이번에도 굳이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관광지 목록도, 유명한 맛집 리스트도 검색하지 않은 채 숙소와 테니스코트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오늘도 그런 하루의 시작이었는데 방청소시간에 떠밀려 무작정 나왔다가 발걸음이 멈춘 곳은 묘했다.
처음 우연히 들렀다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홍콩에 올 때마다 오게 되는 한 인도네시아 식당 앞이었다.
새로운 골목을 탐험할 수많은 기회를 뒤로하고, 내 몸은 기억이 이끄는 대로 이곳에 당도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넣었다. "나시고랭, 그리고 레드빈 아이스."
기름진 볶음밥 위에 얹어진 계란 프라이의 아는 맛, 팥이 들어간 달고 시원한 음료의 익숙한 목 넘김.
영수증에 찍힌 메뉴들을 보며 문득 나에게 몹시 궁금해졌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까지 기어이 똑같은 식당, 똑같은 메뉴를 선택하는 이 반복은 무엇일까.
단순한 게으름일까, 아니면 모험을 회피하고 싶은 나의 방어기제일까.
너무 궁금한 마음에 몇 년 전 애니어그램 특강을 들으며 인연을 맺었고,
명상과 심리상담에도 도움을 주시는 원장님께 카톡을 급작스레 보냈다. 돌아온 답은 의외로 즐겁고 담백했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인간이 에너지를 가장 적게 쓰는 방향을 선택하는 본능이며 지금 내 상태에서 가장 안정적인 판단이라는 것.
그 메시지를 읽고 김이 나는 나시고랭을 한 숟가락 뜨며 깨달았다.
나는 지금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중이다.
코트 위에서 나는 매 순간 판단하는 자리에 앉는다. '체어'에 오르는 순간부터 나의 모든 감각은
'In'과 'Out'을 구분하기 위해 곤두선다.
비디오 판독을 한다면 0.1초의 차이를 포착하거나 센터코트의 큰 화면에 나올 판정화면을 준비하고 정리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찰나의 순간에 룰을 적용해야 하고, 나의 판정 하나가 선수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거나 전 세계 TV중계화면에 실시간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중압감을 매번 숙명처럼 여기고 또 견딘다.
그곳은 모호함이 허용되지 않는, 에너지 소모가 극심한 세계다.
낯선 식당에 들어가 이 음식이 맛있을지 없을지, 이 선택이 성공일지 실패일지 가늠하는 그 사소한 '판단'의 노동조차 코트 밖에서는 내려놓고 싶었었나 보다. 이미 검증된 아는 맛의 세계로 도망쳐, 안전하게 에너지를 비축하고 싶었던 본능이었다. 그렇기에 남들이 다 찾아보고, 블로그나 인스타에 알려진, 그래서 특히 외국에서 한국사람들만 우르르 몰려가는 그런 맛집이 있는 도시에 가도 크게 관심이 없던 이유도 이 본능때문이었나 싶다.
"에너지가 충만해지는 건 죽기 전 아닐까요?."라는 원장님의 농담 섞인 위로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심판석에서 내려온 순간까지 완벽하게 깨어있을 필요는 없다.
역마살을 따라 흘러온 이 이국적인 도시에서, 가장 익숙한 맛에 기대어 잠시 판단의 스위치를 끈다.
작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 평범한 볶음밥이, 오늘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휴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