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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u Nov 21. 2020

'어린이 도서관'의 기억 (2)

그곳에 있던 나를, 계속 사랑하기 위하여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나는 규칙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이를 싫어했다. 아이라는 존재는 밥벌이를 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매일 마주쳐야만 하는 거북하고 성가신 존재였다. 이용자가 제멋대로 떠들어재껴도 당당하게 주의를 주기 힘들 정도로 민원을 두려워해야 하는 입장에서 직원들 모두는 스스로가 얼마간 비굴하다고 느끼면서 일해야 했고, 이용자를 응대하는 최전선에 있었던 나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상황을 납득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직장을 쉽게 그만둘 만큼의 여유란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니까. 계속하기 위해서는 계속할 수 있는 내면의 질서가 필요했다. 1과 2가 외부에서 싸우고 있더라도 내 안에서는 그것들이 더 이상 싸우지 않아야 했다.     


시작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갈 수도 있었으나 운 좋게 내게로 온 일자리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첫 번째 도서관의 관장이 내게 해주었던 '그게 바로 어린아이야'라는 말의 의미를 10년간 곱씹으면서 출퇴근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단순한 한마디 말은 내가 있는 곳이 누구를 위한 장소인지, 아이라는 존재가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 칼같이 주의를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부모가 아이를 방치하고 있다면 그것이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따로 이유가 있거나 단지 그 순간에 부모가 지쳐있을 뿐이라는 뜻인지에 관해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빠른 속도로 나이를 먹었다. 그것은 한 시절과 맞먹는 세월이었다. 30대 초반이었던 내가 40대 초반이 되는 동안 엄마 등에 업혀 오던 아기는 멀쩡한 어린이가 되어 눈을 반짝이며 책을 빌려 갔고, 혼자서는 원하는 바를 제대로 말할 줄 몰라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던 꼬마가 어느 날 중학생이 되어 동생을 데리러 왔다.           


오랜만에 도서관을 다시 이용하러 온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머, 아직도 계시네요? 어쩜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그럴 때면 내가 강산이 바뀌어도 늙지 않고 같은 자리에 영원히 앉아 있는 도서관의 유령처럼 느껴졌다. '그게 바로 어린아이야'의 의미가 내 몸에 완전히 스며들기까지 믿을 수 없이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동안, 시간은 그렇게나 빠르고 정확하게 흘렀다.      


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 도서관에서 일을 시작하고서도 6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야 1과 2의 중요성에는 더하고 덜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무언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맞닥뜨린 상황에서는 많은 경우 1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어쨌든 도서관은 사람이 만들어놓은 장소일 뿐이지만, 아이라는 존재는 그 시절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 특성을 안고 자라나는 생명체니까.     


'징하게 시끄럽다'가 '뭐가 저렇게 재밌대?'로 바뀌고, '어쩜 교양 없게스리'가 '지금 저 엄마가 힘든가보다, 규칙을 지킬 체력이 없나봐'로 서서히 바뀌는 동안, 나는 결혼을 했고 두 번의 이사를 했으며 마음이 사납거나 나를 존중하지 않는 두 명의 친구와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많은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도 읽고 잠자기 전에도 읽었다. 일할 때도 읽고 휴가 중에도 읽었다. 


1과 2를 각각 주장하는 이용자들의 싸움은 여전했다. 여기에 대해 소극적으로라도 취할 수 있는 나의 태도는 서로 조금씩 양보가 되도록, 양쪽에서 얼마간의 불편을 느끼더라도 화라는 감정까지는 가지 않도록 보살피자는 것이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 같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상황을 해석하는 시선이 중요했다. 그럴 수 있는 일로 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상황도 내 존재를 흔들 만큼 대단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봄가을이 되면 도서관 앞 좁디좁은 정원에서 아이들은 나름의 놀이를 했다. 그 놀이 소리는 30대 초반의 나에겐 견딜 수 없이 시끄러운 소음이었다. 6년 뒤의 그 소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도심 속에서 한 줌 자연을 발견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자유롭게 생동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실내에서 책을 읽거나 수업을 듣는 아이들을 방해했다.           


나는 나가서 조용히 하도록 지도해야 했지만, 온갖 학원 수업과 숙제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꽃 한 송이, 곤충 한 마리를 보고 느낀 잠깐의 재미와 행복을 연장해주기 위해 주의를 주러 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유예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한동안 앉아있으면, 강사들이 수업을 하다가 나와서 조용히 하라고 직접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했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않은 탓에 그들이 수업의 흐름을 끊고 수고스럽게 교실을 나왔어야 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곤 했다.         


아이들의 특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엄마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보수가 없는 가사일과 육아에서 의미를 찾고 휴식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나이에 육아로 중단된 그들의 사회적인 시간을 좋은 책으로 채워주고 싶었다. 유행 타는 베스트셀러 대신 작지만 단단한 출판사에서 나온 깊이 있는 책들을 신간으로 골랐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도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도록, 남편과 자녀가 있는 '정상가족'에 속해 있지만 수많은 여성들이 다른 삶을 선택하는 현실을 존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층위의 생각과 고민을 유도하는 책을 눈에 띄는 자리에 배치했다.          


그런 식으로 '어린이'와 '도서관'이라는 단어가 조합된 그 장소에서 누구보다 일을 잘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춘 사람이 되었을 때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정말로 너무나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나는 도서관을 그만두었다.           


변화와 성장과 도전. 그것이 한 자리를 오랜 시간 지키고 있는 사람의 내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은 강했다. 회사도 나도 그런 믿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더 큰 책임이 있는 직책을 맡지 않은 채로도, 더 중요한 책임을 나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10년 전과 훌쩍 달라진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서술할 수만 있었다면, 회사와 내가 나를 보는 눈이 조금쯤은 다를 수 있었을까.           


오래전 대학생 시절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를 겨우 두 달 채우고 그만두게 되었을 때 사장님은 예상했었다는 듯 이렇게 말했었다. "알바생들이 오면, 이제야 좀 제대로 커피를 만든다 싶을 때 꼭 그만두더라고요." '이제야 제대로'의 상태를 만들어가는 데 아르바이트는 두 달이 걸렸지만, 서로 상충하는 욕구를 가진 아이들과 보호자가 드나들던 그곳에서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나에게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가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다는 것이 나의 대답이다.      


나는 다만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가끔 도서관이 '도서관다워질' 때가 있었다.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그렇게 활발하던 아이들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 조용히 앉아 책에 몰입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 그랬다. 자신만의 세계에 완전히 젖어들어 있는 아이들을 보다 보면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책장을 넘기는 아이들의 동작만이 그곳에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렸다. 


그 시간에도 아이들은 조용히 자라고 있을 터였다. 느닷없이 책에 빠져들어 바삐 움직이고 있을 마음뿐만 아니라, 고요히 앉아 있는 동안에도 아이들의 뼈와 근육은 부지런히 자라는 중이었을 것이다. 멈춘 듯하지만 가열차게 생동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부모들은 그곳에서 내가 맡은 역할로 인해 도서관이 안전한 공간이라고 여겼다. 해가 저물녘,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도서관이 문을 닫기 직전의 시간까지도 혼자서 책을 읽으며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에게 나는 아이들의 보호자였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자신의 아이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안전히 잘 있는지 확인해가며 책을 정리하고 퇴근을 준비하면 되었다. 부모는 몇 시간 동안 아이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에 대해 도서관에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엄마 아빠는 용케도 문 닫는 시간을 넘기지 않고 도서관에 도착했다. 웃으면서 들어온 그들은 마치 일주일 만에 아이와 재회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랑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아이가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나가려 하면, "선생님께 인사~" 하고 말하며 자녀가 어른에게 인사를 하도록 교육하는 걸 잊지 않았다.  


가족이 그렇게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나는 가방을 챙겨 들고 도서관의 불을 차례대로 껐다. 책들이 어둠 속에 안전히 가두어졌는지 확인한 뒤 문을 잠갔다. 조용하고 어두운 골목을 돌아 버스정류장으로, 나도 그들처럼 나의 집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그럴 때 나는 계약서가 차갑게 나를 명시하는 말, '을'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던 장소의 구석구석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내려앉아 머문다. 기획자와 설계자, 관할기관은 짐작하지 못하는 '을'의 마음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장소를 지켜나간다. 그 마음에는 임금노동자로서의 불만이나 회의, 분노 또한 자리하고 있겠지만 그런 부정적인 마음과 매번 싸워 이길 줄 아는 더 큰 마음이 존재하는 덕에, 하나의 장소는 쇠하지 않고 유지되어 나간다.            


10년 동안 지난하고 느리게 전진한 어떤 마음에 관해 타인이 지극히 공감해주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다만 꾸준히 도서관을 드나드는 동안 6살에서 12살이 되고 12살에서 고등학생이 되던 아이들의 한 시절의 일부를 공유하고 지켜주었다는 것으로, 그들이 좋은 책을 만나 좋은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고르고 소개했다는 것으로, 단지 그랬다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내면의 긍지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내가 계약서 속 무력한 을이 아니라 한 장소에 마음을 주고 돌볼 줄 알았던 가치 있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는 동안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들려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그곳에서의 나는 이름을 가진 개인이 아닌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성스레 책을 골라 빌려 읽고, 그 책을 반납하며 또 다른 책에 대한 기대를 품은 채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오던 사람들의 일상에 나의 그 역할이 어떤 안위를 전해주었기를, 그 안위의 순간이 부디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기를, 마음속 깊이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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